지난 2014년 10월 말이었다. 이만수(61) 전 프로야구 감독은 최창원 SK 와이번스 구단주의 초청으로 SK텔레콤 서울 을지로 사옥에서 ‘마지막 조찬’을 했다. 3년 계약을 마치고 SK 와이번스 감독 직함을 막 내려놓은 뒤였다. 자리에 마주 앉아 최 구단주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은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였다. 이 전 감독은 망설임 없이 “할 일이 22가지나 된다”고 답해 최 구단주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22’는 선수와 감독 시절 이 전 감독의 유니폼 등번호이기도 하다. 그는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야구 덕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곰곰이 정리해 적어보니 해설, 강연, 야구교실, 손주들과 야구놀이, 해외 재능기부 등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았다”고 돌아봤다. 그중에서 그가 지금까지 가장 애정을 쏟는 것은 해외 재능기부다.
최근 경기 고양의 한 야구장에서 만난 이 전 감독은 “4년여 동안 ‘할 수 있는 것들’ 목록이 더 늘었다. 35가지쯤 된다”며 허허 웃었다. 늘어난 13개 목록은 거의 ‘라오스 야구’와 관련한 것들이다. 이만수는 ‘전(前) 감독’보다 ‘라오스 야구의 아버지’라는 호칭이 더 익숙해졌다.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에 가입조차 돼 있지 않았던 야구 불모지 중의 불모지 라오스가 이 전 감독을 만나 지난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최근에는 라오스 정부와 DGB금융그룹의 후원으로 수도 비엔티안에 라오스 최초의 야구장 건설도 확정됐다. 라오스를 야구 세계화의 마중물이라 판단한 WBSC는 최근 사무총장을 파견해 현지 분위기를 파악해가기도 했다.
한국 프로야구의 ‘레전드’로 불리는 이 전 감독이 하필 라오스와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특별하지 않다. SK 감독이던 2013년 11월쯤 자신을 라오스의 한국인 사업가라고 소개한 사람에게 받은 e메일이 시작이었다. 다짜고짜로 “한 번 건너와서 재능기부를 해달라”는 내용이었는데 첫 e메일 뒤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안 되겠다 싶어 정중한 사양의 의미로 “시간 되면 한번 건너가겠다”고 했더니 오히려 방문 날짜를 정해달라는 요구로 발전했다. “감독 그만두면 가겠다”는 말과 함께 이 전 감독은 컨테이너박스 5개 분량의 중고 유니폼과 스파이크화를 보냈다. 이후 이 전 감독은 “감독 마치면 라오스로 건너가 재능기부를 할 생각도 있다”고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혔지만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다. 라오스는 잊고 지냈다. 아내의 대쪽같은 한마디가 있기 전까지는.
김성근 감독 후임으로 사령탑에 부임할 때 일부 팬들의 극심한 비난을 받기도 했던 이 전 감독은 감독 생활 내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인터넷상의 악성 댓글을 넘어 가족 외식 자리에 나타나 이 전 감독 면전에 욕설을 쏟아낸 고교생도 있었다. 감독 유니폼을 벗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도 대학 신입생 때 처음 만난 첫사랑인 아내였다. 이 전 감독은 그런 아내를 위해 보름간의 동유럽 부부여행을 몰래 계획하고 항공편과 숙소 예약까지 모두 마친 뒤 일부러 카페로 아내를 불러냈다. ‘서프라이즈’를 외치려던 순간 까마득히 잊고 있던 라오스가 아내의 입을 통해 다시 떠올려졌다. “자기가 먼저 할 얘기가 있다고 말을 가로막더라고요. 그러면서 꺼내는 말이 라오스 재능기부 약속부터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당신이 약속을 안 지키면 앞으로 어떤 일을 해도 누구도 당신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여행 얘기를 꺼냈더니 여행은 언제든 갈 수 있는 거니까 당장 라오스로 떠나라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도 라오스가 어디 있는 나라인지 잘 몰랐다는 이 전 감독은 2014년 11월에 가방 2개와 여행 가이드북만 들고 그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작정 라오스로 들어갔다. 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본 라오스의 첫인상은 우리나라의 1960년대를 떠올리게 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 전 감독은 “알고 보니 그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제일 못 사는 나라가 라오스더라. 도착 다음날 재능기부 한다고 운동장에 가보니 고작 11명뿐이라 연습게임도 할 수 없었다”며 “한국인 사업가랑 머리를 맞대고 야구 배우러 오면 물이랑 빵을 준다는 모집공고문을 돌렸더니 200명이 모이더라. 운동화를 신은 친구는 거의 없고 슬리퍼 아니면 맨발이었다”고 돌아봤다. 일회성 재능기부를 생각하고 들어간 것이었는데 하다 보니 제대로 하고 싶어졌다. 달리기와 던지기 테스트로 40명을 추렸고 이들은 훗날 라오스 최초의 야구 국가대표팀 ‘라오J브라더스’의 주축이 됐다.
이 전 감독이 라오스에 야구를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야구계 등 주변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고 한다. ‘감독 재계약 실패하고 부끄러우니까 도망갔다.’ ‘얼마 못 가고 그만둘 것이다.’ 둘 다 아니었다. 이 전 감독은 4년 넘게 부지런히 한국과 라오스를 오갔다. 라오스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학교 보내고, 훈련 시켰다. 국내에 머물 때도 쉴 틈이 없었다. 전국의 초중고와 대학 야구부까지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재능기부를 했다. “야구로 유명한 학교는 프로에 나가 잘된 선배들이 도와주지만 그렇지 못한 학교가 훨씬 많다”는 이유였다. 지난해 방문한 국내 유소년 야구팀만 52군데다. 자동차 주행거리가 1년에 4만㎞를 넘었다. 현역 시절 자신의 별명을 딴 ‘헐크파운데이션’을 2016년에 설립한 후로는 라오스에 한국인 지도자들도 제법 많이 파견했다. 덕분에 여자 야구선수도 30명쯤 된다.
프로야구를 떠난 뒤 4년여간 이 전 감독의 벌이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종종 강연으로 용돈을 마련할 뿐이다. 한때 몇몇 기업으로부터 광고 모델료로 총 4억원을 받았지만 초중고 등에 야구용품을 기부하는 데 전액을 썼다. 4년여 동안 집에 10원도 못 가져다줬다고. 그래도 아내는 “50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으니 걱정하지 말고 나눠주라”고 응원했다.
이 전 감독은 처음 라오스로 날아간 날과 라오스에 야구협회가 생긴 날, 협회 부회장으로 대표팀을 이끌고 아시안게임에 출정한 날짜 등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야구장 건설이 확정된 23일도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됐다. 우리나라 국회와 현지 정부를 쫓아다니며 2년 가까이 끈질기게 발품을 판 끝에 라오스 정부로부터 부지를 무상으로 제공받았고 국내 기업으로부터는 공사비 후원을 이끌어냈다. 이 전 감독은 “첫 야구장을 계기로 시설을 더 늘려 언젠가 라오스에서 아시아 대회, 세계 대회를 유치하고 싶다”고 했다. “필립 질레트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야구를 보급할 때 우리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가 죽고 나서 라오스 야구가 우리나라처럼 세계를 호령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라오스 야구에 주춧돌을 놓고 국내에서는 걷지 못하는 날까지 전국을 다니면서 야구로 받은 사랑을 나눠주는 게 인생의 마지막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1호 홈런과 3년 연속 홈런왕 등 홈런으로 유명했던 이 전 감독은 “야구에서처럼 인생에서도 꼭 홈런만이 멋진 것은 아님을 현장을 떠난 뒤 매 순간 깨닫고 있다”고 했다. 그는 “희생번트와 희생플라이의 기쁨은 물론 볼넷이나 텍사스 안타, 에러로 출루하는 행운도 얼마든지 많다”며 “많이 가지고 높아져야만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때로는 희생도 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행복을 가진다면 그보다 아름다운 인생이 또 있을지 궁금하다”며 빙긋이 웃었다. /고양=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 사진=성형주기자
He is
△1958년 강원 철원 △1982년 한양대 체육학 학사 △1982년 삼성 라이온즈서 프로야구 데뷔, 프로야구 1호 안타·타점·홈런 △1983~1985년 3년 연속 홈런왕 △1983~1987년 포수 부문 5년 연속 골든글러브 △1984년 홈런·타격·타점 1위(트리플크라운) △1997년 은퇴(16년 통산 타율 0.296, 252홈런, 861타점) △2005년 메이저리그 시카고 화이트삭스서 불펜코치로 월드시리즈 우승 △2006년 SK 와이번스 수석코치 △2011년 SK 와이번스 감독 △2015년 KBO 육성위원회 부위원장 △2016년 헐크파운데이션 이사장 △2017년 라오스야구협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