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워싱턴DC 정상회담에서 미·일 ‘케미’(화학적 결합만큼이나 끈끈한 관계를 일컫는 케미스트리의 줄임말)를 과시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자리를 일본과의 무역협상을 조기에 타결하려는 전략적 무대로 삼았다. 오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아베 총리가 미국과의 밀월을 강화하는 정치적 노림수를 꺼내 들었다가 오히려 무역에서 성과를 내 내년 재선에 성공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역공에 말려들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28일 일본 언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정상회담 첫날인 지난 26일(현지시간) 사전 협의 없이 미·일 무역협상이 5월에 타결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했다. 그는 아베 총리와 45분 단독회담에 앞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양국 간 무역협상 타결 시점을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달) 일본 방문 때 서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아사히는 방금 전까지 “다음달 일본에서 스모 경기를 관전하고 우승자에게 트로피도 전달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 이야기에 흐뭇해하던 아베 총리가 ‘돌발 발언’에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미·일 무역협상 수석대표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 모테기 도시미쓰 경제재생상이 지난 15~16일과 25일 두 차례 만났지만 이 자리는 무역 의제를 논의하는 정도였을 뿐 본격적인 협상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베 총리는 기자들이 물러난 뒤 트럼프 대통령에게 “5월 말 합의는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1대 1 정상회담이 끝난 뒤에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이 더 노골적으로 펼쳐졌다. 그는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배석하는 1시간짜리 확대 회의에 앞서 기자들에게 “일본이 미국 농산물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우리는 일본 차에 관세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며 무역 불균형 시정을 요구하고 일본 자동차사들이 미국 생산을 늘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탈퇴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지난해 말 발효하고, 올해 2월 유럽연합(EU)과의 경제연대협정(EPA)이 시행되면서 미국 농산물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자 관세 철폐를 압박한 것이다. 이에 아베 총리는 “미국은 아직 일본 차에 2.5%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고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베 총리가 캐나다로 떠난 뒤에도 깜짝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27일 저녁 위스콘신주 그린베이 유세에서 “우리는 매년 680억 달러의 대일 무역적자에 대해 재협상하고 있다”며 “미국에 자동차 공장을 짓기 위해 토요타 140억 달러를 포함해 400억 달러를 투자하겠다고 아베 총리가 약속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회담장에 일본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에 230억달러를 투자하고 일자리 4만3,000개를 만들었다는 내용의 A3 크기 상황판까지 준비해 갔지만 무역 문제에서 큰 소득을 얻지 못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지난해 9월 이후 공화당 강세지역과 경합지에 진행되고 있는 투자 계획에는 별도의 강조 표시를 해가며 자신들의 노력을 대선과 연관 지으려 애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5월 국빈 방문하고 6월 오사카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기로 하면서 아베 총리가 정치적 효과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 자리가 또 무역협상 조기 타결을 위한 트럼프 대통령의 무대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트럼프 대통령이 2개월 연속 방문하면서 무역협상 조기 합의를 위한 압력이 강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