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이 한치 양보 없는 ‘강(强) 대 강’ 대치를 이어가면서 유럽과 중국의 고민도 점점 깊어지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미국이 핵 합의(JCPOA)를 탈퇴한 뒤에도 이를 준수하겠다고 버텼지만, 미국과의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 때문에 마냥 이란 편만 들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 중인 러시아와 달리 유럽과 중국은 제재에 동참하라는 미국, 그리고 경제적 지원 방안을 마련하라는 이란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8일(현지시간) 이란의 철강·알루미늄·구리·철 등 금속류 수출을 막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지난해 이란 제재를 복원하며 원유·달러 거래를 차단한 데 이어 비원유 부문 최대 외화벌이 수단인 금속류 거래까지 막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테헤란(이란)은 근본적으로 행동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한 추가 조치를 기대해도 좋다”며 이란 정권에 핵 야욕을 버리고 협상 테이블로 복귀하라고 촉구했다.
이번 조치는 앞서 나온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의 폭탄 발언에 대한 보복 카드다. 로하니 대통령은 “유럽이 60일 안에 이란과 협상해 핵 합의에서 약속한 금융과 원유 수출을 정상화하지 않으면 우라늄을 더 높은 농도로 농축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수장인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도 핵 합의 서명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중국) 중 하나인 영국을 찾아 이란 제재 동참을 압박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영국과 다른 유럽 파트너들이 이란의 핵무기 시스템 접근을 막는 데 함께 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유럽이 이란과의 교역 전담을 위해 설립한 ‘금융 특수법인’(SPV)인 인스텍스와 관련해 “SPV가 제한적 목적(인도적 지원)에 사용된다면 수용할 수 있지만, 이를 넘어선다면 관련자들에 대한 제재가 있을 수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유럽은 이번 사태에 대해 원론적 입장만 밝혔을 뿐 정상들의 특별한 언급은 내놓지 않았다. 독일 외무부는 유감을 나타내면서도 이란이 핵 합의를 지키는 한 독일도 이를 완전히 이행하겠다며 이란을 달랬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도 폼페이오 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란에 사태를 악화시키는 조치를 삼가라고 촉구하겠다”면서 “이란이 핵 합의를 이행한다면 영국도 이를 포기하지 않겠다”며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장관 역시 이란이 합의를 어기면 유럽 차원의 제재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라면서도 “프랑스는 핵 합의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처럼 독일·영국·프랑스가 조심스러운 자세를 보이는 이유는 미국과 이란 모두 유럽의 중요한 경제·외교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對)EU 수출입액이 지난해 6,740억유로를 기록하는 등 미국은 EU의 최대 교역국 자리를 수십년째 이어왔다. 또 2015년 프랑스 BNP 파리바가 제재 위반으로 89억달러의 과징금을 맞은 뒤 유럽 기업들 사이에서 ‘이란 사업이 위축되는 것보다 미국의 제재 리스트에 오르는 것이 더 두렵다’는 인식이 조성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유럽 입장에서 이란과의 관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최근 이민자 문제가 유럽의 최대 골칫거리가 된 상황에서 이란은 중동 이민자 유입을 막는 중간지대라는 중요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란으로 들어온 아프가니스탄인은 무려 250만명에 달한다. 로하니 대통령도 이를 노리고 8일 기자회견에서 “이란은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과 마약을 억제하는 중요한 길목”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미국의 이란 제재를 비판하고 있지만 사실은 고민이 깊다. 중국은 이란산 원유 최대 수입국인 데다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 사업의 중요 파트너라는 점 때문에 공개적으로 이란을 지지해왔지만 막판 삐걱대는 미·중 무역협상 때문에 미국 눈치를 살피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이달 2일 미국의 이란산 원유 수입의 유예 기간이 끝날 때 이란은 중국이 최소한 미국의 압박을 거부하고 이란산 원유 수입을 계속해주길 바랬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미국과의 무역합의가 교착 상태에 빠지는 상황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