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을 비롯한 그의 육형제는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원과 이유승 형제를 양부와 친부로 둔 당대 최고 명문가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국권을 강탈당한 후 우당의 제안에 따라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경영함으로써 독립군의 기틀을 세웠다. 그러나 해방이 됐을 때 살아 돌아온 사람은 대한민국의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한 사람뿐이었다.
이유원의 양자이며 당대 최고의 부자였던 둘째 이석영은 굶어 죽었고 ‘양반사대부에서 혁명가로 전환한’ 이회영은 고문으로 죽었다. 남편과 아버지를 따라나선 가족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감당해야 했다. 당시는 유교적인 가부장적 윤리가 사회의 지배이념으로 확립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내면화되고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가장의 결정에 따르는 점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형제의 가족들은 이유원의 집이 있던 가오실(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에서 동대문까지 올 때 남의 땅을 밟지 않았다고(황현, ‘매천야록’) 할 정도로 부유하게 지내다가 한 달에 반은 밥을 짓지 못하는 생불여사(生不如死·살아 있음이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 지경으로까지 궁핍하게 지냈다. 그러한 삶을 영위한다는 것 자체가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은 아내와 자식으로서 남편과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의 결단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관련 활동을 한 경우도 많았다. 우당 이회영의 아내 영구 이은숙은 사대부 여인의 윤리를 실천하면서 근대인으로 거듭난 인물이었다.
이은숙은 20세이던 지난 1908년 남대문 근처의 상동교회에서 42세의 이회영과 결혼했다. 둘의 만남을 중매한 사람은 이은숙의 종조(할아버지의 남자 형제)로 이회영과 함께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관직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 서울 한복판에서 거행됐다. 이회영은 한 해 전에 상처하고 슬하에 2남 1녀를 둔 재혼남이었다. 이은숙은 형제들이 가득한 집에 시집을 와 잠시만 남편이 없어도 어디다 마음을 의탁할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나라가 쇠망해 가면서 점점 더 ‘밖으로’ 돌았다.
1910년 12월 우당 형제들은 압록강을 넘었고 다음 해 1월9일 오전4시부터 일어나 횡도촌을 향해 첩첩산중 기암괴석 사이에 쌓인 백설과 얼음 위를 지독한 추위를 참으며 6~7일을 갔다. 이은숙은 높은 가문의 부인으로서는 듣지도 못했을 이 같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여필종부(女必從夫)의 본의를 지키며 괴로운 표시는 조금도 나타내지 않았다. 많은 나이 차와 전통적인 부부관에 따라 남편에게 의지하며 그 뜻을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은숙에게 우당은 전형적인 가부장 이상의 존재였다. 우당은 1907년 고종에게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을 건의해 절친인 이상설을 정사, 이준을 부사로 보냈다. 또 월요일이면 밤을 새워 3년(결혼 후 만주로 떠나기 전까지)을 하루도 빠짐없이 비밀 결사를 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남편은 남편을 넘어 국권회복에 매진하고 있던 애국지사였다.
이런 남편을 이은숙은 하늘같이 우러러보고 스승같이 모시면서 점점 닮아갔다. 친정어머니 1주기를 맞아 귀국하면서 중요 서류를 숨겨 가지고 들어오다가 신의주를 지나 백마라는 곳에서 경찰에게 체포된다. “점잖은 양반 부인이 왜 이런 나쁜 서류를 가지고 다니시오?”라는 경찰 서장의 질문에 “당신네에게는 이것이 나쁘다 하지만 우리 혁명 가족에게는 으레 있는 일이지 나쁜 것이 무업니까”라고 맞받아친다.
다음 일화는 그녀의 ‘의리’가 얼마나 단호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25년 3월30일 박용만의 귀순공작을 시도한 혐의로 김달하가 다물단에 의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심산 김창숙이 ‘우당장 내외가 김달하 상에 조상을 갔었으니 앞으로는 절교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다물단원 1명이 육혈포를 차고 집을 주시하는 것을 보며 가만히 있으면 남편의 신변이 위험해질 것이라고 느낀 이은숙은 아침 일찍 13세이던 아들 규창을 데리고 칼을 품은 채 단재, 심산이 머무르던 집으로 찾아간다. 아침 식사 중이던 두 사람에게 “너희 눈으로 우리 영감이 김달하 집에 조상간 것을 봤느냐. 잘못 보는 눈 뒀다가는 우리 동포 다 죽이겠다. (중략) 정말 바로 말 아니 하면 이 칼로 너희 두 놈을 죽이고 가겠다”고 몸무림을 치며 두 사람을 휘어잡아 사과를 받았다.
또 다른 일화 역시 그녀의 의리가 깊고 질긴 것을 잘 보여준다. 그녀는 나날을 굶으며 지내던 중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들과 딸 둘을 놓아두고 홀로 귀국했다. 귀국 후 그녀는 화약 냄새가 나는 고무공장의 노동자가 됐고 유곽 여인들의 옷을 세탁하는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 벌어들인 돈을 매달 20원가량 부쳤다. 그녀는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나마 남편이 끼니를 거르지 않게 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의리는 이승에서 저승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가족들의 전언에 의하면 이은숙은 애초 회고록을 집필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해방 후 창춘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우당과 함께 활동한 사람들에게 우당의 행적을 글로 써 줄 것을 부탁했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여기에는 우당이 “혁명가는 메모나 일기를 남기지 않는다. 주소나 연락처도 머리에 기억한다. 약간의 기록물도 그 자리를 떠나면 반드시 불태워버린다”를 철칙으로 삼아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하늘같이 우러러보며 스승같이 모셨던 남편의 행적이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이은숙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돋보기를 쓴 채 손으로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7년의 세월이 지나갔고 드디어 87세이던 1975년에 ‘민족운동가 아내의 수기-서간도 시종기’가 발간됐다. ‘결혼 후 서간도로 가기 직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의 경험’이 한 여인의 고고한 마음에 담겨 세상에 소개됐다. 책을 접한 독립운동 전문가인 윤병석 전 인하대 교수는 “한국독립운동사의 중요 면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언급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저술”이라고 평가했다. 남편의 고귀한 행적을 전하려는 늙은 아내의 사사로운 정리가 역사적·사회적 의미가 매우 큰 공공 저작물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전환을 보여준 것이다.
그 시작은 사대부 여인의 의리에서 시작됐지만 그녀가 남편과 아이들과 형제들과 같이한 생활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자원’이 됐다. 그녀는 성찰적 의리를 바탕으로 한 인간으로서 또 여인으로서 품위를 지키면서 사회의 혁명적 전환을 능동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진보에 기여했다. 그녀는 단순히 한 책의 저자가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켜야 하는 현대인 특히 한국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서현주 동북아역사재단 교육홍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