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삼성전자 직원들은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다. 미중 간 고래 싸움에 유탄을 맞을 수 있다는 염려 탓이다. 정보기술(IT) 전문매체 지디넷 등 외신에서는 “반(反)화웨이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결국 삼성전자”라는 분석 기사가 하나둘 쏟아지고 있지만 손사래를 친다. 한 임원은 “스마트폰 등 세트와 통신 장비에서는 반사이익이 있을 수 있어도 부품(반도체·디스플레이)은 곤혹스럽다”며 “우리로서는 기존 비즈니스에 충실하면서 최대한 ‘로키(Low-key)’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이런 분위기는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국내 대표 IT 기업에서 화웨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삼성전자만 해도 화웨이는 5대 매출처 중 하나고, SK하이닉스도 매출의 10%가 화웨이에서 나온다. 자칫 중국의 맞대응으로 또 다른 메이저 납품처인 애플마저 무역분쟁의 쓰나미에 쓸려가면 실타래가 한층 꼬일 여지도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밸류체인이 얼기설기 얽혀 있어 국내 업체의 유불리를 예단하기 어렵다”면서도 “다만 스마트폰과 통신장비 분야에서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국내 기업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화웨이 사가는 부품 대금이 판 완제품의 25배=화웨이는 통신장비 시장에서 세계 1위, 스마트폰에서는 삼성에 이어 2위다. 국내 부품업계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 화웨이가 국내 기업의 부품을 사들이는 데 쓴 비용은 12조6,000억원(지난해 기준)에 이른다. 삼성·하이닉스의 메모리, 삼성디스플레이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LG이노텍의 카메라 모듈 등이 그런 예다. 반면 화웨이가 LG유플러스·SK텔레콤·KT 등 국내 기업에 장비 등을 수출한 규모는 최대 5,000억원 정도(추산)에 그친다. 국내 부품의 수입 규모가 수출의 최소 25배다. 우리가 반(反) 화웨이 진영에 합류해 이른바 화웨이와 백병전에 가까운 난타전을 벌일 경우 국내 기업 피해가 훨씬 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우리 기업들이 미중 무역분쟁의 화약고가 되고 있는 반화웨이 전선에서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는 이유다. 통신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중 사이에 끼어 국내 기업이 진짜 화웨이 장비를 쓰지 않게 될 경우 국내 파장은 엄청날 것”이라며 “화웨이도 도널드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따른 제재를 피해가기 위한 대응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부품과 달리 통신장비 분야의 후발주자 삼성전자 등에는 지금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 삼성의 경우 지난해 점유율은 5%(IHS마킷 기준)로 화웨이(31%), 에릭슨(27%), 노키아(22%), ZTE(11%)에 크게 못 미친다. 하지만 화웨이가 미국 제재로 주춤하면서 도약이 예상된다.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5세대(5G) 시장에서도 삼성은 에릭슨·노키아 등을 앞서 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삼성은 내년까지 점유율을 20%로 올린다는 목표를 일찌감치 세웠는데 화웨이 변수로 더 치고 올라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5G 투자가 한창인 미국과 한국에서 장비 공급 현황을 보면 삼성이 유럽 업체를 앞선다”며 “이대로면 내년 올림픽 개최로 개화되는 일본 5G 시장에서도 삼성이 유리한 위치를 점할 것 같다”고 봤다.
◇핀치 몰리던 스마트폰에는 호재, 메모리는 회복에 악재=화웨이 스마트폰은 고립무원에 놓였다. 구글의 모바일 운영체제(안드로이드)에 접근할 수 없게 된 데 이어 반도체 설계자산(IP)의 90%를 보유한 영국 ARM도 등을 돌려 칩 설계마저 여의치 않다. 내수 시장이야 버틴다 해도 화웨이 스마트폰 판매의 60%는 중국 외 지역에서 발생한다. 시장에서는 올해 화웨이의 스마트폰 판매량이 7,500만대에서 최대 1억대까지 감소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화웨이의 ‘P30 프로’ 등의 중고폰 가격은 폭락세다. 화웨이가 공을 들여왔던 유럽·남미 시장에서 삼성·LG전자가 한숨 돌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메모리다. 화웨이는 삼성 반도체 매출의 5%(증권업계 추정), 하이닉스 매출의 10%를 차지한다. 화웨이가 부진하면 삼성의 갤럭시폰이나 오보·비포 등 다른 중국폰이 더 팔려 전체 매출을 메워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가 하향하는 마당에 메이저 업체의 부진에 따른 대체 수요가 클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설상가상 중국에서 애플 판매가 고꾸라질 수도 있다. 한 애널리스트는 “업계 2~3위인 화웨이와 애플의 동반부진은 시장 파이를 쪼그라뜨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특히 순수 메모리 업체에 가까운 SK하이닉스가 더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봤다.
삼성디스플레이도 아이폰 수요 감소로 어려움이 불가피하다. 화웨이가 유럽 등 하이엔드 시장을 공략하면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채용을 확대하고 있었다는 점도 더 아쉬운 대목이다. 일각에서는 화웨이에 납품하던 마이크론의 메모리 물량이 삼성·하이닉스로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중국 정부가 마이크론 불매를 강제하지 않더라도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마이크론 부품 비중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재계의 한 임원은 “한국 기업이 반중국 진영에 설 경우 ‘제2의 사드’ 사태와 같은 불이익이 생길 수 있다”며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상훈·박효정기자 shle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