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전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로펌들은 글로벌 국제중재 시장에서 별 존재감이 없었다. 국제 분쟁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고 이해도도 낮아 대응방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해외 로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과 외국 정부, 해외에 상륙한 한국 기업, 국내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도 한국의 로펌들을 찾기 시작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경제규모가 세게 10위권으로 도약한 국가 입장에서도 국제중재 시장에서의 한국 로펌의 활약은 경제성장의 한 축으로 자리 매김하는 분위기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곳은 김앤장 법률사무소와 법무법인 태평양이다. 2002년 본격 출범한 태평양 국제중재팀은 국내 최초의 전문팀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부쩍 늘어난 국제소송 대리업무를 처리하다 한국 로펌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한 김갑유 대표변호사와 팀장인 방준필 미국변호사가 주축이 됐다. 현재 총 70여명의 전담 인력을 보유하고 있고 이 가운데 20명 이상이 미국과 영국, 호주, 인도, 파키스탄, 부탄 등에서 합류한 다국적 팀이다. 김 대표변호사는 국제상업회의소 중재법원(ICC) 부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태평양 국제중재팀은 지난 2016년 6월 시작된 1조6,000억원 규모의 론스타-하나금융지주 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법원 분쟁에서 하나금융지주를 대리해 올 5월 예상을 깨는 전부 승소를 이끌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았다. 2010년에는 현대중공업을 대리해 외환위기 때 잃었던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되찾는 완전 승소를 거두기도 했다.
김앤장 국제중재팀은 국내 1위 로펌답게 태평양에 견줄만한 팀웍과 조직력을 자랑한다. 김앤장은 현재 산업통상자원부 무역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신희택 당시 변호사와 국제중재팀 공동팀장인 윤병철·박은영 변호사를 필두로 1990년대 후반부터 국제중재 분야에 투자를 시작했다. 윤 변호사는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 최초 한국인 이사를 거쳐 현재 ICC 국제중재법원 상임위원을, 박 변호사는 현재 런던국제중재법원(LCIA)의 부원장과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중재법원 상임위원 등을 맡고 있다. 미국·영국·독일 변호사를 비롯해 변호사만 60여 명에 이른다. 2016년 아랍에미리트(UAE) 부호 만수르의 회사로 잘 알려진 하노칼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2,400억원대 ISD 사건을 맡아 미국 초대형 로펌과 맞서 소송 취하를 이끌어낸 것은 이 팀의 대표 성과로 꼽힌다.
두 로펌이 하나의 사건을 두고 손을 맞잡기도 했다. 현대중공업과 카타르 바르잔 가스컴퍼니 간 하자보수 국제분쟁 사건은 두 로펌이 힘을 합쳐 해결한 대표 사례다. 태평양과 김앤장은 하자보수 청구금액만 9조원대에 이르던 사건을 2,600억원에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 국제중재 원투 펀치로서의 위용을 재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