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강남구의 한 재건축아파트 일반 분양에 당첨된 지인을 만났다. 현재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고 있는 그는 “괜히 청약을 한 것 같다”며 계약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하나다. 11억원이 넘는 돈을 끌어올 데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9억원을 초과하는 고가의 아파트는 중도금 대출이 막혀 있어 무주택자라고 해도 대출이 불가능하다. 이리저리 돈 빌릴 데를 알아보다 여의치 않자 결국 포기하게 된 것이다. 비슷한 사정의 사람이 많았던 탓에 이 아파트의 일반 분양 계약률은 50%대에 불과했다.
그는 서울에 사는 30대 평균 직장인이다. 대기업에 다니며 무주택자로 전셋집에 살고 있다. 4인 가구의 가장으로 1년에 1,000만원을 저축하기도 만만치 않다. 강남권에서 계속 살아온데다 초등학생 자녀의 교육 여건을 생각해 계속 강남권에서 살고자 한다. 하지만 현재 강남권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로 내 집 마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금융권 대출이 막혀 있어 수억 원의 자금을 끌어올 데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강남만의 얘기가 아니다. 부동산 정보 서비스 업체 ‘직방’의 분석을 보면 올해 서울 민간 아파트 가운데 9억원을 넘긴 비율이 무려 48.8%에 달한다.
정부는 이 상황에서도 실수요자 중심의 시장 조성을 외치고 있다. 대출 억제가 정작 실수요자마저 묶어놓았다는 사실은 간과하고 말이다. 대출 규제로 직장인의 꿈을 좌절시키는 동안 강남의 신축 아파트는 현금 부자의 몫이 되고 있다. 올 초 서울 주요 아파트의 일반 물량은 미계약과 부적격자 당첨이 속출해 청약통장도 갖고 있지 않은 현금 부자들에게 돌아갔다. 소위 말하는 ‘줍줍(줍고 또 줍는)족’의 잔치가 됐다.
줍줍족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정부는 청약 예비당첨자의 비율을 기존의 80%에서 500%까지 늘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예비당첨자를 늘려도 결과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예비당첨자가 계약을 포기하면 줍줍족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같기 때문이다. 정부는 예비당첨자를 한 겹 더 세우는 ‘예예비당첨자’ 제도를 새로 꺼낼 것인가.
집값 상승에 대한 정부의 우려는 이해할 만하다. 적정한 수준을 넘어서는 부동산 가격 폭등은 심각한 부작용을 양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대출을 이중 삼중으로 꽁꽁 묶어놓는다면 집값 상승보다 더 우려스러운 현실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부동산 시장이 회복했을 때 결과는 어떨 것인가. 돈을 가진 자가 줍줍으로 주택을 대거 보유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축적한 모습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직장인들은 한없이 올라 있는 집값에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무한 억제 방식의 대출 규제는 실수요자에게 피해가 갈 수밖에 없다. 무주택자에게는 대출의 문을 열어줘야 할 때다./kdhy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