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정책

전직 관료들의 탄식 "조언하려 해도 전화도 안 받아…기업은 오죽하랴"

[기업하기 힘든 나라]

책임 안지려 꽁꽁 언 관료 사회

민원 통로 오해살라…OB 회피

기업 입장 전하면 "물들었다" 핀잔

1716A03 공무원 책임 회피 사례들



“후배 관료들에게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요. 기업 정책 아이디어나 조언을 해주려 해도 도통 소통이 안 돼요. 민간기업들은 오죽하겠어요.” (전직 금융관료 A씨)

“마치 ‘적폐 트라우마’에 걸린 것 같습니다. 탈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부서는 ‘기피 1호’ 대상이라고 해요. 차기 정권에서 책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너무 사려요.” (경제부처 국장 출신 B씨) ★관련기사 3면


전직 선배 관료들이 후배들의 행동과 업무태도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토해낸 탄식이다. 혁신의 지렛대가 돼야 할 공무원 사회가 몸을 바짝 숙이며 화석화되고 있다는 질책이다. 글로벌 경제전쟁의 포연은 더욱 짙어지는데 한국 관료들은 기업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효자손이 아니라 발목을 잡는 성가신 존재가 되고 있다는 직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금융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한 전직 관료는 “정책을 밀실에서 뚝딱 만들어 통보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현장과 동떨어진 이념성 정책이 양산되면서 민간과 기업으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꼬집었다. 그는 “관료사회가 잔뜩 움츠러들어 기업 담당자를 만나 애로사항을 듣는 것을 꺼린다”며 “경제가 어려울수록 민간과 소통하면서 규제를 풀어야 하는데 한숨이 나온다”고 토로했다. 승차공유, 쓰레기 매립지, 조선 구조조정이 헛바퀴 돌고 있는 가운데 네이버 데이터센터 건립마저 무산되면서 관료들의 복지부동이 위험수위를 넘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입으로는 앵무새처럼 규제 완화, 투자 활성화를 외치지만 정작 뒤에서는 기업 하기 힘든 나라를 초래하고 있다는 얘기다.

관료사회가 식물화되고 있는 것은 ‘정권이 바뀌면 신(新)적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장관과 차관의 결재가 없어지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경제부처의 서기관급 공무원은 “기록에 남는 결재는 국·과장급이 전결 처리하고 장·차관은 구두 보고를 받는 게 일상화됐다”며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다. 기업들이 이에 따른 유탄을 맞고 있다. 경제부처의 한 관료는 “솔직히 기업은 불가촉 대상”이라며 “기업인을 만나면 동료들로부터 ‘기업에 물들었다’는 핀잔을 듣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세종=한재영기자·박한신 기자 jyhan@sedaily.com

<탈원전부서 ‘기피’...젊은 관료조차 논란정책은 “문제될라” 발빼>

공유경제 등 갈등소지 있으면 최대한 시간 끌어 현상유지

규제완화 책임은 안지면서 “고용·투자 늘려달라” 닦달


“오해살라” 사람 안만나...관료도 이념정책에 운신폭 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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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최근 1세대 1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비과세 혜택 유지 여부를 두고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생각함’에 설문을 올렸다가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9대1 수준으로 폐지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던데다 관련 내용에 대한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설문을 아예 중단해버렸다. 기획재정부 세제실은 “비과세 혜택 폐지를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감한 정책을 두고 ‘여론 떠보기’를 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해프닝으로 일단락됐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관료 사회에 만연한 여론과 당청 눈치 보기, 책임 회피 성향이 그대로 투영됐기 때문이다. 차관을 지낸 전직 기재부 관료는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정책은 없다. 관료가 나름의 철학과 이유를 갖고 정책을 고민했다면 이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양도세 비과세 폐지 논란은 공직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민간 안 만나고 책임 피하고=공직 사회의 복지부동과 여론 눈치 보기 성향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런 고질병은 더 악화하고 있다. 신산업 분야 규제 철폐를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대립이 어느 때보다 극심한데다 현 정부 들어 진행된 적폐청산 작업을 직접 목격했던 터라 분위기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탈원전 정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자원실이 ‘기피 부서’가 된 것에도 이런 분위기가 한몫했다. 논란의 소지가 있어 보이면 일단 최대한 시간을 끌어 현상 유지하는 게 최선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다.

신사업 분야에서의 복지부동은 고질병이 된 지 오래다. 국내 첫 숙박공유 스타트업인 ‘코자자’의 조산구 대표가 지난해 10월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숙박공유를 둘러싼 규제를 언급하며 “가슴이 터지는 심정”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도심 내 숙박공유는 외국인에만 허용돼 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중점 육성산업으로 키우겠다고 한 바이오헬스 분야도 행정의 벽이 여전하다.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 1호 대상으로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 검사(DTC)’를 선정하면서 ‘바이오산업의 규제 빗장을 풀었다’고 자평했지만 현장의 체감도는 싸늘하다. 건별 심사를 통해 승인받은 사업만 가능하도록 하는 포지티브 규제 방식으로는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나오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경제조사본부장이 지난 4월 “정부 부처에 규제 완화를 요구하면 샌드박스를 이용하라는 답이 돌아온다”며 “샌드박스가 규제 완화의 회피 창구로 쓰이고 있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이념정책에 관료들 선택폭 줄어=‘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한국판 로비스트 규정(외부인 접촉 관리)’이 생기면서 기업인들과의 소통이 완전히 단절되다시피 됐다. 로비스트 규정은 공정위 직원이 대기업 대관팀 직원이나 전관(前官) 등 외부인을 만날 경우 해당 내용을 내부 보고하도록 한 자체 규정이다. 내부에 신고를 하고 외부인을 만날 수는 있지만 혹여라도 차후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만남 자체를 피하는 분위기다. 공정위의 한 관계자는 “같이 일했던 OB라도 민간에 있으면 만나기 불편한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기업의 한 대관 담당자는 “기업들 입장에서 공정위는 막강한 행정력을 가진 부처”라면서 “로비 목적이 아닌 건전한 정책 소통의 창구마저 닫힌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들어 추진되는 대부분의 정책이 이념적 성향을 띠고 있기 때문에 관료로서는 취사선택할 수 있는 정책의 폭이 좁다”고 말했다. 경제 정책마저 이념의 틀에 포획돼 있다 보니 정책의 다양성이 제한되고 운신의 폭도 좁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일례로 대기업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투자세액공제율을 올려 감세를 해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기재부 관계자는 “‘대기업 증세’라는 당청의 기존 입장에 변화가 선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업계 사정도 모르고 “투자 고용 확대해라” 닦달=소극행정만큼이나 산업계 현실과 동떨어진 보여주기 정책 추진도 기업들을 지치게 한다. 철강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 3월 경제부처 공무원으로부터 황당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광주광역시와 현대자동차그룹이 광주형 일자리 투자에 합의했듯 철강사도 지자체와 ‘○○형 일자리’를 만들 방법을 모색해보라는 취지였다. 이 관계자는 “중국이 올해 초부터 조강(組鋼)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어떻게 실적 하락을 방어할지 고민하던 차에 설비투자와 고용을 확대해달라는 정부의 요청을 듣고 당혹스러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엇보다 철강산업은 소수 작업자가 공장을 오퍼레이팅(조작)하는 대표적인 장치산업이다. 작업자가 생산 라인에 달라붙어야 하는 자동차 산업과 달리 투자의 고용 효과가 크지 않다. 앞서 철강업계 관계자는 “해당 부처 공무원이 철강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는 있는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장치산업인 석유화학 업체들도 정부로부터 비슷한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5대 그룹의 한 관계자는 “규제 철폐, 노동개혁 같은 국내에서 기업 할 수 있는 요인은 내버려두면서 투자와 고용을 확대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했다./세종=한재영·김우보· 빈난새기자 jyhan@sedaily.com

한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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