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의 힘든 유배생활에서도 53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고통의 긴 세월을 저술을 통해 화려하게 승화시켰던 그의 높은 경지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1762~1836)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의 지독한 삶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 가슴이 먹먹했었다. 한 시대가 낳은 천재적 혁신기획가이며 형을 그리워하는 동생이었고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바로 그가 남긴 수많은 기록을 통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얼마 전 국가기록원 설립 50주년, 공공기록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개최된 ‘2019년 기록의 날’ 기념식에 참석했다. ‘기록이 없으면 정부도 없다(No record, No government)’는 말씀을 강조하던 고(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자문 기록관리위원회 활동을 지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과거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 등 선진 기록문화를 구축한 모범국가였다. 그러나 식민 지배와 권위주의 정부를 거치는 동안 공공기록물 관리가 허술하게 이뤄졌다. 기록하지 않고 기록을 없애는 것은 곧 역사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뜻이기에 부끄러운 과거를 돌이켜보게 한다. 다행스럽게도 정부 수립 이후 52년 만에 만들어진 ‘공공기록물법’을 통해 공공기록물 관리가 혁신되고 대통령기록체계가 수립되면서 유명무실했던 국가기록관리체계를 새롭게 정비하는 초석이 됐다. 정보공개의 기준 미비, 다양한 업무 간 기록의 연계성 관리 부재, 기록 관련 의식 부족 등으로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공기록물의 혁신은 더 투명하고 책임 있는 행정을 구현하는 기반이 됐고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보루가 됐다.
올해는 한국전쟁 69주년이 되는 해다. 수많은 사람이 이 땅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깊이 있게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기록으로 관리하고 있는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보여준 수많은 희생과 헌신을 생각한다면 한국전쟁은 ‘잊힌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
‘공공기억이 역사를 성찰하게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공공기억과 이에 대한 기록은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책임의식에서 나오며 도덕과 윤리를 지켜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는 성장과 발전의 논리에 급급한 나머지 가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가치 있는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소홀했다. 이에 한국국토정보공사(LX)도 국내 최초로 기록관과 도서관·박물관의 기능을 통합한 ‘라키비움(Larchiveum)’을 구축하고 있으며 이를 토대로 공공기록물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자 한다. 자랑스러운 일이든 부끄러운 일이든 이를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일은 우리가 역사 앞에 좀 더 당당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게 하는 ‘문명의 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