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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백남준을 만나다]"처음엔 회오리탑, 스파이럴…아니 다다익선이 낫겠어"

<16> 역작 '다다익선'의 비화

건축가 김원과의 인연으로 작업 시작

회오리 → 원통 → 나무 → 英 스톤헨지

작품 구상안 수차례 수정하며 완성

1,003개의 TV…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스파이럴보다 다다익선이지 뭐" 결정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 앞날도 예고

지난해부터 노후화로 가동 전면 중단

1988년 첫 공개된 당시의 ‘다다익선’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1988년 첫 공개된 당시의 ‘다다익선’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과천관 원형홀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경제DB백남준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과천관 원형홀에 자신의 작품을 설치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경제DB


백남준(왼쪽)과 건축가 김원이 1986년 10월 만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원형홀에 영구설치할 비디오 신작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원백남준(왼쪽)과 건축가 김원이 1986년 10월 만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원형홀에 영구설치할 비디오 신작에 대해 의논하고 있다. /사진제공=김원




백남준의 대표작이자 최대규모의 작품인 ‘다다익선’은 어떤 이유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들어서게 됐을까. 그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신군부세력의 ‘12·12사태’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제5공화국이 지닌 태생적인 정통성 결여에 닿는다. 당시 정부는 대규모 기념비적 문화 치적사업을 통해 쿠데타의 기억 위에 새로운 정신성을 덧씌우는 전략을 세웠다. 권력자의 명분이야 어쨌건 그 덕에 우리나라는 상당한 문화시설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있었다.

1982~85년 제8대 문화공보부 수장으로 재임한 이진희 장관이 이 임무를 맡았다. 당시 이 장관은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자크 랑 문화부 장관이 추진한 대규모 도시건축 프로젝트인 ‘그랑 프로제’를 벤치마킹했다. ‘그랑 프로제’는 루브르박물관의 유리 피라미드, 개선문 건너편 샹젤리제 거리 끄트머리에 조성된 라데팡스 상업지구, 혁명정신의 시발점인 바스티유의 오페라극장, 세느 강변에 자리잡은 아랍연구기관 아랍인스티튜트 등의 탄생을 이끌었다.


프랑스의 선례를 배운 한국 정부는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한다.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 대회가 열린 지 2개월 만에 국민 성금으로만 500억원이 모였다. 이진희 장관은 서울·대전과 인접한 100만평 규모의 독립기념관 자리를 못 구해 고민하던 중 건축가 김원(76)을 만난다. 김원은 그때까지만 해도 미신 취급 받던 풍수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풍수지리학회의 회장이었다. 헬기를 타고 지세를 살펴 충남 천안시 흑성산 앞쪽에 독립기념관 부지를 찾아준 일을 계기로 김 건축가는 장관과 인연을 맺었다.

내친김에 독립기념관 설계까지 맡으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김원은 오히려 국민적 염원이 담긴 사업인 만큼 공모로 설계자를 선정해야 한다며 고사했고 장관의 더 큰 신임을 얻었다. ‘그랑 프로제’를 표방한 이 장관이 독립기념관을 비롯해 서초구에 예술의전당과 국립국악당(현 국립국악원)을 건립하고,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쓰던 중앙청을 헐어버리는 대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전용하며, 국립현대미술관을 짓는 것까지 소위 ‘5대 그랜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모든 과정에 김 건축가가 자문 역으로 관여했다.

서울 도심에서 너무 멀리 있다는 비판도 있었으나 과천에 국립현대미술관 자리를 물색해 대규모 야외조각장을 겸할 수 있는 부지를 찾아준 이도, 국제 공모로 설계자를 뽑으라 제언한 이도 김원이었다. 미술관은 1984년에 신축공사가 시작돼 1986년 8월 개관했다. 문제는 미술관 건물의 중앙부 ‘램프코어’의 형태였다. “사선으로 돌아 올라가는 모양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같지 않아?” 누군가 툭 던지듯 한 말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보완책이 필요했다. 김원은 “건축물 형태에 눈길이 가지 않으려면 그 이상으로 시선을 압도할 작품이 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와 미술관 관계자들은 ‘어떤 작품이 답일까’를 골몰하기 시작했다.

차기 문공부는 이원홍 장관이 맡았다. 당시 문화예술국장이던 천호선이 김원을 불렀다. 둘은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기도 하다.

“원아, 백남준…알아?”

“이름은 들어봤지.”

“백남준 선생에게 작품값을 다 드릴 수는 없지만… 과천 미술관에 기증을 받으면 좋겠어. 백 선생님도 한국에 돌아오는 기념으로 고국에 거창한 작업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 것 같아. 그런데 과천관 원형홀을 염두에 두자니 구조체가 너무 커야 해서, 건축가 한 사람을 소개해 주면 좋겠다고 하시네.”

김원은 무릎을 탁 쳤다. 반짝거리는 화면, 시시각각 변화하는 영상은 방문객의 시선을 잡아끌어 건축물에 눈 둘 틈을 주지 않는 최적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천호선은 앞서 1970년대 말 뉴욕 총영사관 한국문화원 문정관으로 근무하면서 백남준과 인연을 쌓았다. 백남준이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전시를 연 것이나, 1984년 ‘굿모닝 미스터오웰’을 시작으로 한 위성예술 쇼의 국내 방송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 그였다. 천호선의 부인 김홍희 전 서울시립미술관장은 당시 백남준과의 만남을 계기로 미술사 연구자가 됐고 지금은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천호선 국장이 대화를 이어갔다.

“백남준 선생이 건축가를 소개해 달라는데, 너 혹시 공짜로 일해줄 수 있겠어?”

당시는 ‘재능기부’라는 단어도 없던 시절이라 천 국장의 말투는 무척 조심스러웠다. 김원은 흔쾌히 “그러자” 했다. 즉시 문공부와 미술관은 백남준에게 작품 설치를 제안한다. 백남준은 1986년 가을, 장소를 확인하고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과천의 미술관에서 김원을 만난 백남준은 자신의 부탁으로 재능기부에 불려 온 젊은 건축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몇 번이나 거듭해 이름을 물었다. 백남준이 자신의 한국말이 ‘구식’이라며 대화와 병행해 쓴 메모지 필담(筆談)에는 그래서 김원의 원(洹)자가 반복적으로 적혀있다. 백남준은 즉석에서 작품에 관한 아이디어와 계획을 쏟아냈다.


“TV모니터 200대, 혹은 300대로 탑을 쌓아 올리면 빈 공간을 메꿀 수 있겠어요. 그 탑의 구조물을 김원 씨가 설계해 줘요. 메탈프레임(철제 구조물)은 가급적 안 보이게 합시다. 예전에 모니터 90대 짜리 작품을 제작하는 데 12만 불이 들었거든요. 그걸 감안해서 구조물 공사비를 산정할 수 있지 않을까? 올해, 내년 준비하면 88올림픽 쯤에 오픈 할 수 있겠어요. 나는 그동안 영상을 만드는데, 작동 원리는 이렇습니다. 그런데 김원 씨, ‘원’ 자를 어떻게 쓴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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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익선 구상도다다익선 구상도


백남준이 ‘다다익선’의 탑을 위에서 내려다 본 형태로 그려 건축가 김원에게 보낸 구상도. TV모니터를 크기에 따라 하나하나 따로 표시했고 눕혀진 것과 세워진 것을 각각 다르게 그려놓았다. /사진제공=김원백남준이 ‘다다익선’의 탑을 위에서 내려다 본 형태로 그려 건축가 김원에게 보낸 구상도. TV모니터를 크기에 따라 하나하나 따로 표시했고 눕혀진 것과 세워진 것을 각각 다르게 그려놓았다. /사진제공=김원


김 건축가는 당시 백남준이 미술관 메모지에 파란 펜으로 그리고 적은 종이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그 자체가 작품 구상안이요, 드로잉이었다. 처음에는 회오리바람 형태로 구상했고 이후 원통형, 나무 모양, 기단부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형식 등 다양한 얘기들이 오갔다. 백남준이 작품 초반에는 러시아 조각가 블라디미르 타틀린(1885~1953)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을 마음에 두었다고 했지만 훗날 완성된 포스터를 보면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헐이 그린 바벨탑, 영국의 고대 거석기념물 스톤헨지, 경주의 창림사지 삼층석탑 등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첫 구상은 회오리 형태였다.

“작품이 다 되면 명패는 이렇게 씁시다. 작품명은 ‘비디오 스파이럴(Spiral·나선형)’. 아니야, 비디오 빼고 그냥 ‘스파이럴’이 낫겠어. 작가 이름은 백남준, 디자인은 김원. 김원 씨 원 자를 어떻게 쓴다고 했지? 그래. 그 아래에다 ‘도네이션(Danation·기증) 오브 아티스트’라고 적자.”

백남준은 공을 독차지하는 법 없이, 자기를 도와준 사람을 분명히 밝혀 그 업적을 인정받게 했다. 1988년 9월 15일 ‘다다익선’을 공개하고 고사를 지내는 제막식에서는 “백남준은 ‘막대기 시집’갔다. 김원이 다 했다”고 칭찬했을 정도다. ‘막대기 시집’이란 혼수는커녕 수저도 챙겨갈 여력이 없어 부지깽이로 쓸 막대기 하나만 들고 결혼하는, 힘든 형편을 빗댄 표현이다. 여담이지만 백남준은 훗날 친구인 염보현 서울시장에게 친필 편지를 써서 ‘김원에게 시립미술관 설계를 맡겨야 한다’고 추천했다. 그때도 백남준은 ‘원’자를 틀린 한자로 적었다 한다.

그전까지 백남준이 만든 최대 규모의 작품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광장에 전시된 1982년작 ‘삼색기’로 TV모니터 384대로 제작됐다. ‘다다익선’ 이후로도 뉴욕 브루클린 체이스뱅크에 설치한 모니터 429대짜리 작품이 최대였다. 즉 ‘다다익선’은 백남준 자신에게도 전례 없는 도전이었다. 김원은 “백남준 선생이 공간에 적합한 스케일에 관해 감이 잘 안 잡혔던 모양인지 작품 전체 크기를 같이 생각해보자고 하셨다”며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작품도 중요했지만 주어진 공간을 장악하는 것도 숙제였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서 브라운관 모니터 샘플을 크기별로 가져다 놓고 논의를 이어갔다.

“김원 씨, 크기가 어때야 할까. 한번 그려봅시다.”

“백남준 선생님, 그리신 대로라면 200~300개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정도 볼륨감이 나오려면 500개나 800개는 되어야겠습니다.”

“그래, 그러지 뭐.”

“흠, 선생님 800개로도 안 되겠어요. 1,000개는 있어야 되겠는데요?”

“그래요? 음…다다익선(多多益善)이지 뭐.”

그렇게 제목과 규모가 결정됐다. 전체 모니터 수는 1,003개는 10월3일 개천절을 뜻한다.

백남준은 ‘다다익선’의 최종 확정안을 1986년 10월 23일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였던 박규형(아트파크 대표)이 타자기로 받아 적었다. 제목은 ‘다다익선’이고 영문명은 ‘The more the better’. 건축가 김원이 작성할 설계도에 따라 미술관이 프레임 제작 및 설치를 제공한다는 내용, 백남준은 실제 개막 전에 그의 조수 폴 게린을 파견해 시설 상황을 점검할 것이며 기술감독은 미술관이 맡되 백남준과 오랫동안 비디오 기술을 공동개발한 일본인 아베 슈야를 추천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백남준 자신은 개막식에 참석할 것이며 “다다익선 프로젝트의 변경 가능성을 일체 배제”한다는 내용도 명시했다. 총 45억원어치 작품용 모니터 1,003대와 예비용 모니터 100대는 삼성전자가 전량 기증했다. 기단부 지름 11m에 높이는 18.5m의 대형작품이 됐다. 총 6개층에 25인치 모니터가 195대, 19인치가 103대, 13인치 93대, 9인치 552대, 5인치짜리 60대가 투입됐다. 김 건축가는 수t에 달하는 전체 하중을 지탱하기 위해 건물 아래 지반에서부터 꼼꼼하게 구조물을 설계했다. 전자기술자 이정성 아트마스타 대표는 작업 후반부에 합류했다.

당시 오고 간 서류들을 보면 백남준의 치밀함이 엿보인다. “모니터의 수명은 정확한 근거가 없으나 7만 시간 이상이고 1일 8시간 사용하면 수명은 약 10년간 된다. 그러므로 10년 후에는 모니터 1,003대 전량 교체가 불가피하다” 했고 “김원 씨에게 별도로 이야기하겠지만 철 구조물 설치 시 모니터를 놓은 채 애프터서비스(AS)가 될 수 있도록 하며 PC보드(내부회로)를 몽땅 빼내서 교체가 가능하도록 프레임 설계가 되게 해줄 것”을 분명히 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경구를 비틀어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다”고 했던 백남준은 이미 ‘다다익선’의 앞날을 내다봤던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03년에 노후된 모니터가 전면 교체됐고 부분 수리 끝에 지난해 2월부터는 가동이 전면 중단됐다.


조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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