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패권을 가진 쪽은 나눠주는 법이 없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넘버2’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우리는 파워게임에서 이기는 쪽으로 붙어야죠. 사대외교를 통해 부국강병을 이룬 세종의 외교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손욱(74·사진) 전 삼성종합기술원장은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장충동 (사)참행복나눔운동 사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고 “만약 패권국인 미국의 불신을 받게 되면 자칫 세컨더리 보이콧(대북제재 위반에 미국이 가하는 제재)에 걸릴 수도 있다. 원전이나 무기 등 전략산업의 수출 길이 막힐 수도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주한미군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로 인해 우리나라가 중국의 혹독한 경제보복을 받은 트라우마가 있지만, 오히려 확실하게 미국과 보조를 맞춰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미국은 목숨 걸고 우리나라를 지켜준 역사가 있다. 한미 정상끼리 본심을 나누고 긴밀해져야 한다”며 “남북관계도 미국에 양해를 구해가면서 풀어가야 한다. 뒤로 (남북이 뭔가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거꾸로 안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화웨이에 (반도체를) 공급하다 나중에 세컨더리 보이콧을 맞으면 진짜 끝난다. 좌파 쪽에서 ‘미국이 설마 그러겠냐’고 하는데 패권국이 전쟁 중인 상대방을 누가 거들면 발로 차지 않겠느냐”고 부연했다.
지난 29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미국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 잠정 중단과 무역협상 재개에 합의했으나 일시적 휴전에 불과해 결국 미중 패권 경쟁에서 어정쩡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세계 질서가 미국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는 마당에 우리가 미국 편을 확실하게 들며 남북관계·한중관계에 관해 양해를 구해야 중국이나 북한도 ‘한국이 미국을 설득해가며 이렇게 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손 전 원장은 세종대왕의 사례를 들어 ‘나라를 지키고 국가이익을 키우는 실리외교’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그는 “세종이 명나라 영락제에게 바짝 엎드려 원하는 것을 열심히 맞춰져 신뢰를 얻었다. 이후 (조공에서) ‘우리는 말이 없으니 감해달라’는 등 실리를 취했다. 세종이 사대하는 것처럼 보여도 국익을 위해 다 빼냈다”고 말했다. 신뢰가 쌓이니 조선이 여진족을 칠 때는 명에 보고를 안 하고도 진행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그는 ‘자칫 제2 사드 보복 사태가 나면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질문에 “미국 편에 확실하게 서면 중국이 그렇게 못한다. 당시 어정쩡해 중국이 그렇게 했다”며 “중국도 우리 반도체를 가져가지 못하면 스마트폰 등을 생산하지 못한다. 우리도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드 사태 때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를 안 하고 힘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 중국에 ‘두들겨 패도 되는구나’라는 빌미를 줬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일본처럼 강한 기술력을 가져야 하는데 중국이 반도체 등을 제외하고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앞서 가는 게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자존심 내세워 ‘저놈은 나쁜 놈’이라고 해봐야 득이 될 게 없다”며 “일본은 기초기술이 좋아 우리 입장에서 아직 일본의 부품·소재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게 많다. 일본을 능가하는 기술과 힘을 갖도록 내부적으로 결속해야 반일을 넘어 극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국 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을 놓고 일본이 조만간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필수적인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에 대해 규제를 할 것이라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나왔는데 하루빨리 한일관계의 파행을 끝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이사장을 지낸 손 전 원장은 연구개발(R&D)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관리 위주의 R&D 시스템과 문화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했다.
그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개발에 대한 목표가 명확해야 하는데 국책연구원은 분명하지 않다. 연구중심 대학도 제대로 된 곳이 거의 없다”며 “과학자는 자율성을 갖고 보람과 꿈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데 경직된 연구시스템에서 창의성이 나오겠느냐”고 지적했다. 대학·출연연·기업에 지원하는 연 20조원 규모의 정부 R&D 과제도 실패하면 재도전할 기회를 주지 않고 관리자도 책임문제가 있다 보니 적당한 선에서 목표가 설정돼 과제성공률이 무려 98%나 되는데 정작 세계무대에서 꿈을 이룬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손 전 원장은 “독일 막스플랑크를 가보면 5년이고 10년이고 연구원에 자율권을 주고 밀어준다. 성공하면 올라가고 실패하면 도태되는 시스템”이라면서 “우리는 목표를 설정하고 자율적으로 연구에 주력하기보다 치밀하게 관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다. 과학자가 불신받는다는 느낌 속에서 연구하면 성과가 나오겠느냐”며 신뢰 구축을 강조했다.
쪼개기식·나눠먹기식으로 연구기능이 분산된 R&D 시스템으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융합연구가 힘들다고도 했다. 그는 “지역균형 발전을 내세우며 중복투자가 이뤄지면서 한 재미 한인 과학자가 ‘한국은 연구소에 1번에서 10번까지 장비가 필요한데 연구소마다 1~2번만 갖추고 있다’고 한탄하더라”며 “미국이 버클리대는 바이오, 코넬대는 나노와 같이 1등 분야를 밀어주는 것처럼 일본도 슈퍼컴퓨터는 교토대, 바이오는 요코하마 연구소 등에 집중 지원해 세계 우수 인력이 모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소득주도 성장 등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국가 정책은 검증받은 것을 해야 한다. 새로운 실험은 견딜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을 때는 괜찮은데 미중 무역전쟁 대혼란기인데다 기존 산업이 내리막길에 있을 때 추진해 혼란을 자초했다”며 “트럼프는 경기 호황을 만들어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든 뒤 중국을 쳤다”고 말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52시간제 등 소득주도 성장이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이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이어 “주52시간제 등 취지도 좋은 게 많고 언젠가는 우리 경제체질을 바꾸기 위해 해야 한다. 다만 타이밍뿐만 아니라 소통하고 공감한 뒤 혁신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됐다. 의사도 수술할 때 환자의 체력을 봐가며 하지 무조건 달려들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기업의 기가 살지 않고 도전정신이 발휘되지 않으면 경제가 침체돼 정권의 기반도 무너진다”며 “정부가 기업 등 다른 경제주체와 공감하며 비전을 제시하고 역량을 키우고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kbgo@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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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전도사로 꼽히는 그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임원, 삼성전관(삼성SDI) 대표 등을 지내며 30여년간 삼성의 혁신과 성장에 기여했다. 지난 1999년부터 5년간 삼성종합기술원장으로서 연구소를 반석에 올려놓았고 2004년에는 삼성인력개발원장으로서 인재양성에 매진했다. 2008년 ㈜농심 대표이사 회장으로 영입돼 감사나눔운동을 펴며 좋은 실적을 올렸고, 2010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초빙교수로 활동했다. ‘삼성, 집요한 혁신의 역사’ ‘혁신을 넘어 창조로 전진하라’ ‘십이지경영학’ ‘나는 당신을 만나 감사합니다’ 등 많은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