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6년 프랑스 솜주의 도시 아브빌. 광장에서 화형식이 벌어졌다. 대상은 만 20세 귀족 청년 프랑수아 장 드 라 바레. 화형식은 오후 늦게 열렸으나 바레는 아침 일찍부터 고문형을 받았다. 사지 고문에 이어 혀를 절단당한 바레는 곧 목이 잘렸다. 당국은 그의 시신을 불태우고 유해를 솜강에 뿌렸다. 사형 집행 직전 고문과 참수, 시신 소각 및 분산이라는 4중 형벌을 가한 셈이다. 프랑스는 왜 북미 개척에 공이 큰 귀족 가문의 젊은이에게 이토록 잔혹한 형벌을 내렸을까.
바레를 죽음으로 내몬 죄목은 신성 모독. 근거가 없었지만 교회와 검찰은 그렇게 몰고 갔다. 발단은 사형 집행 11개월여 전에 일어난 성물 훼손 사건. 아브빌 다리 위해 나무 십자가가 훼손됐는데 범인을 찾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가톨릭 신앙이 강했던 지역으로 유명했던 아브빌 시민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누구의 소행인지 밝혀지지 않자 시민들의 관심사는 더욱 커졌다. 세속과 성직 권력 일부가 이 사건을 사회적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계기로 삼으려던 즈음, 한 치안판사가 바레를 위시한 젊은이 세 명의 소행이라는 의심을 품었다.
바레와 다툰 전력이 있던 판사는 이렇다 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대신 방증 수사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전직 시장의 아들을 포함한 젊은이들이 자주 몰려다니며 악동 짓을 일삼았으며 성상의 행진에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증언이 나왔다. 바레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처지가 점점 불리해지는 가운데 가택 수색에서 ‘두 가지 물증’이 발견됐다. 포르노 책과 함께 볼테르의 ‘철학서간(영국에서의 편지)’이 숨겨져 있던 것. 영국의 종교·정치·경제·학문을 소개하며 프랑스의 후진성을 질타한 철학서간은 출간과 동시에 볼테르 체포령이 내려졌던 금서 중의 금서였다.
결국 십자가 훼손 사건 발생 7개월여 뒤 지방판사들은 사형선고를 내렸다. 파리의 상급법원은 여기에 공범을 자백하게 만들겠다며 사형 직전 고문형을 추가시켰다. 정작 바레는 어떤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죽어갔다. 재야 지식인이었던 볼테르의 구명 노력도 허사로 끝났다. 사형집행 당국은 볼테르의 서적도 시신과 함께 장작더미에 던졌다. 사건 이후 근래까지 프랑스 보수층의 경원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바레는 종교적 불관용의 희생양으로 상징화하는 분위기다.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가 없앴던 바레의 동상을 비롯한 기념물이 프랑스 곳곳에 서 있다.
/권홍우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