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中 'R&D 인해전술'로 뛰는데...韓은 연구실 컴퓨터 끄라니"

5인이상 사업장 확산 땐 투자여력 낮은 중소기업 궁지

정부 "주5일제 시행 초기와 같은 진통일뿐" 치부하지만

업계 "인건비 오르고 기술 추격당하는 현실 모르는 소리"

출연연선 "학생연구원 주52시간 묶여 학업 제약"




4일 경기도의 한 반도체 제조장비업체 연구실. 출근 직후 시작된 업무회의가 30분 만에 간단히 끝났다. 이전에는 1시간 이상 진행했지만 최근에는 아예 생략하거나 이날처럼 약식으로 끝낸다고 한다. 정해진 업무시간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이를 위해 성과보상 시스템도 확충했다. 주 52시간 근로제를 도입할 경우 부족해질 연구시간을 최대한 보완하기 위해서다.

이 업체 고위관계자는 이날 “주 52시간제 적용이 가져올 연구개발(R&D) 근무시간과 인력 부족에 대비해 기존 인력의 업무 집중도와 효율성을 더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대비하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업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도 어느 정도에서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고 신규 인력 충원은 쉽지 않아 제품을 개발해 공급할 때 납기를 제대로 못 맞추게 될까 걱정이 많다”고 하소연했다.


주 52시간제의 폐해는 기업이 아닌 국가 두뇌집단인 정부출연 연구기관에도 불어닥쳤다. 출연연 내 개인용컴퓨터(PC)는 일과 시간 중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강제로 꺼진다. 학생연구원들도 일반근로자의 근로시간(주당 40시간, 하루 8시간) 기준을 적용받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연구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며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한 출연연에서 박사학위를 준비 중인 학생연구원은 “연구 환경은 어느 곳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이어야 하는데 사무실처럼 컴퓨터가 꺼지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출연연 관계자는 “학생연구원들이 학생이자 근로자의 이중 지위를 갖게 됨으로써 공부를 해도 이를 업무로 간주해 주 52시간제에 따른 근로시간 제약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생기게 됐다”며 “연구는 물론이고 학점 이수를 위한 과제활동조차 업무인지 개인 공부인지 확인받아야 하느냐는 학생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어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현행 제도의 틀 내에서 행정적인 대안을 마련하고 있다”고 전했다.

업무 특성을 가리지 않는 주 52시간제의 무차별적인 도입이 불러온 산업 현장의 실상이다.


신기술·신서비스 출시 주기가 빠른 게임 등 소프트웨어(SW) 분야에서부터 동력전환 혁명 앞에 선 자동차 및 에너지 관련 산업까지 우리의 주력수출 분야 기업들의 상당수가 주 52시간제에 따른 R&D 역량 추락의 공포에 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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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아직은 대기업·중견기업들이 주로 적용 대상이지만 향후 2년 내에 근로자 5인 이상 사업장 전반으로 확산된다면 현행 영세 연구인력조차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중소·벤처기업들은 한층 더 궁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국내의 한 중소게임사 간부는 “솔직히 지금도 R&D 전담인력만을 두기에는 형편이 어려워 다른 부차적인 업무도 겸하도록 하는 상황”이라며 “현행 법대로라면 우리는 2021년부터 주 52시간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그에 맞춰 인건비가 높은 R&D 인력을 더 뽑기는 쉽지 않다”고 전했다.

주 52시간제 적용 대상 기업들의 R&D 인력 확충 여력이 빠듯하다는 것은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산업기술진흥협회가 정부 정책건의용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기업들의 평균 연구원 수는 매출 500억원 이상 기업의 경우 지난 2013~2017년 약 15~16명 사이에서 게걸음을 걸었다. 그보다 매출이 적은 기업에서는 전반적으로 평균 연구원 수가 하향세를 이어갔다. 연구비 투자는 기업규모별로 양극화돼 2017년 현재 중소기업의 평균 R&D 비용(3억4,000만원)은 대기업(314억원)의 거의 100분의1 수준까지 격차가 벌어졌다.

그동안 청와대나 정부부처 관계자들에게 주 52시간제의 부작용에 대해 지적할 때면 한결같이 2003년 ‘주 5일제’ 시행 초기와 같은 일시적인 진통일 뿐이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고는 했는데 이 같은 답변이 얼마나 안이한 탁상행정 식인지 알 수 있다. 한 전자업계 대기업 임원은 “아직도 주 5일제 시절 운운하는 공직자가 있다면 정말로 현실을 모르는 분”이라며 “지금은 우리의 인건비가 선진국 수준까지 올랐고 중국에 기술력으로도 추월당하는 시기인데 더 열심히 일하기는커녕 8시간씩만 일하고 집에서 여가나 즐기라고 하니 후발국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또 다른 게임사 관계자도 “우리 업계는 한 번 신작 프로젝트 출시 스케줄이 잡히면 몇 주에서 몇 개월씩 집중해 밤새 일해야 하는데 하루 8시간 정시 근무하고 퇴근해 저녁 있는 삶을 즐기라는 정부의 발상 자체가 참으로 공무원스럽고 허황되다는 생각이 든다”고 전했다.



민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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