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갖던 시간, 청와대 정책실은 다른 이유로 숨 가쁘게 움직였다. 당일 오전 일본 산케이신문에서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로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의 핵심소재에 대한 수출규제에 나선다는 보도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는 이날 오후3시께 긴급회의가 소집됐다.
이날 오전11시께 국내 A그룹 부회장에게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A그룹의 한 관계자는 “두 분은 김 실장이 시민단체에 있던 시절부터 친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이날 통화에서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에 따른 파급을 분석한 자료를 오후로 예정된 회의 이전에 청와대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의 긴급 요청에 기업들 역시 긴박하게 움직였다. 김 실장은 이날 삼성·LG·SK 등 국내 5대 그룹의 주요 부회장들에게 모두 직접 전화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실장은 이어 다음날부터 김기남·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비롯해 기업 핵심관계자들과 만나 관련 대책을 논의했다.
문재인 정부의 세 번째 정책실장이자 ‘구원투수’로 투입된 김 실장이 취임 초부터 광폭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가 워낙 민감한 사안이기는 하지만 정책실장이 직접 본인의 인맥을 동원해 기업 임원들과 접촉하는 것은 매우 낯선 모습이다.
김 실장은 여기에 더해 주요 언론사 간부들과도 릴레이 만남을 갖는 등 다방면으로 소통을 늘리고 있다. 김 실장은 지난달 취임 이후 청와대 정책실 내부에 첫 지시사항으로 ‘이해관계자들과의 만남’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같은 김 실장의 행보에 대해 일단은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전임자들에 비해 기업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시민단체 및 공정거래위원회 시절에 쌓은 인맥을 통해 이해관계자와 직접 소통하면서 청와대 정책실의 문턱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의 한 고위관계자는 “통상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 담당 부처 공무원과 기업 실무진 간 논의부터 시작돼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청와대 정책실장과 기업 임원들이 바로바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은 대책의 속도와 효과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김 실장은 이에 더해 소득주도 성장 등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에 대해서도 ‘유연성’을 확보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다만 청와대 안팎에서는 김 실장의 다소 ‘튀는 행보’와 ‘돌출 발언’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동시에 나온다. 물밑에서 정책을 조율해야 할 대통령의 참모가 전면에 나설 때마다 불필요한 오해와 논란을 일으키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문재인 정부에서는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간 갈등에 따른 ‘경제 투톱’ 논란이 장기간 지속된 바 있다.
김 실장은 취임 직후 “각 부처 장관께서 야전사령관이고 청와대 정책실장의 역할은 병참기지다. (정책실장은) 홍남기 경제부총리와 각 부처 장관들이 현장에서 충실히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후선에서 지원하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대선캠프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의 정책에 관여한 ‘핵심실세’인 김 실장이 튀는 행보로 세간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면 자연스레 ‘경제 투톱’ 논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취임 초라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기 위해 김 실장이 다소 파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곧 정책실장으로서의 본인의 역할을 정리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윤홍우·양지윤기자 seoulbird@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