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대장’으로 악명 높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의 만남에서도 1시간 늦어 눈총을 샀다.
푸틴 러시아는 4일(현지시간) 서방 주요 국가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러시아에 우호적인 정부가 집권 중인 이탈리아를 국빈 방문했다.
그는 이날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교황청으로 달려가 교황을 예방하고 약 1시간에 걸쳐 양자 간의 현안을 논의했다. 다만 푸틴 대통령이 늦게 도착하면서 회담 시작이 1시간 가량 늦춰졌다.
교황청은 1시간 정도 지속된 면담이 끝난 뒤 성명을 내고 “두 사람이 환경 문제를 비롯해 시리아와 우크라이나, 베네수엘라 사태 등 국제적 현안, 러시아에서의 가톨릭 신자들의 삶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고 밝혔다. 면담이 끝난 뒤 교황은 푸틴 대통령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고, 푸틴 대통령은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대화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겼다.
즉위 후 종교 간 일치와 화해를 일관되게 강조해온 교황은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 개선도 꾸준히 추진해온 터라 이날 이와 관련된 이야기도 나눴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관심을 모았던 교황의 러시아 초청 이야기는 이 자리에서는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은 러시아 공산화 이후 단절했던 양국의 국교를 2009년에야 전면적으로 복원한 바 있다.
특히 이번 만남은 우크라이나의 가톨릭 지도자들이 교황청을 방문하기 하루 전에 이뤄지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우크라이나 가톨릭 지도자들은 교황의 초청으로 오는 5∼6일 교황청을 방문, 최근 이뤄진 러시아 정교회와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분열 등 우크라이나가 처한 상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작년 12월 중순 우크라이나 정교회 창설을 선언하고, 러시아 정교회에서 독립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종교적 정통성을 부인하면서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푸틴은 교황과 작별한 뒤 세르지오 마타렐라 대통령,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와 차례로 회동하고 양국의 현안과 관계 증진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와 함께 이탈리아 포퓰리즘 정부의 두 실세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겸 내무장관, 루이지 디 마이오 부총리 겸 노동산업부 장관과의 만찬을 위해 이탈리아 상원으로 이동했다.
이탈리아는 EU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연합(EU)의 대(對)러시아 제재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등 작년 6월 포퓰리즘 정부 출범 후 노골적으로 친러 성향을 보이고 있어, 이날 푸틴과 이탈리아 정부 주요 인사들의 회동은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진행된 것으로 관측된다. 푸틴 대통령은 현지 일간 코리에레델라세라와의 회견에서 살비니 부총리와 그가 이끄는 반(反)난민, 반EU 성향의 정당인 ‘동맹’을 지칭하면서 “그들은 미국과 EU가 도입한 러시아 제재의 조속한 폐지를 추진하고 있으며, 러시아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칭찬하기도 했다.
강경 난민 정책을 앞세워 현재 이탈리아 정치인 가운데 가장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살비니 부총리는 과거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푸틴을 찬양하는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는 등 이탈리아 정계에서 대표적인 친러시아, 친푸틴 인사로 꼽힌다.
한편, 푸틴은 4일 코리에레델라세라에 실린 인터뷰에서 러시아는 타국의 내정에 관여한 일이 결코 없으며, 앞으로 그럴 의도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러시아가 미국 선거에 개입했다는 주장은 극히 터무니없는 것”이라며,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가 이끈 미국 수사팀이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관여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은 “간단히 말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뮬러 특검팀은 러시아 정보요원들이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승리하도록 도왔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트럼프의 선거운동 진영과 러시아 사이의 적극적인 유착 관계를 밝히는 충분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은 또한 러시아가 지난 5월 실시된 유럽의회 선거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부정했다. 그는 “그것은 평범한 유럽 시민들의 눈에 러시아를 악마화하기 위해 고안된 풍문에 불과하다”며 “우리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이든 다른 어떤 국가든 간에 타국의 내정에 간섭한 일이 없고, 앞으로 그럴 의도도 없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