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였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왕과 선비들이 어떻게 세상을 봐야 할지 준거가 된 책은 다름 아닌 ‘중용’이었다. ‘중용’은 3,500여 자에 불과한 짧은 분량이지만 유교 고전을 일컫는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가장 체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책으로 꼽힌다.
성종은 학식이 높은 신하들을 불러 모아 토론하는 것을 즐겼으니 특히 ‘중용’과 ‘대학’에 관해 대신들이 단체로 토론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했다. 통치철학에 초점을 맞춘 ‘대학’과 달리 ‘중용’은 인격 수양의 길을 제시했다. 이 같은 모임은 먹고 마시는 연회가 아니라 학문의 향연이 펼쳐지는 자리였다. 경전에 밝은 신진을 적극 등용해 기득권을 쥔 훈구파를 견제할 수도 있었다. 16세기 후반 조선의 선비들은 ‘중용’에 등장하는 ‘나 한 사람의 도덕성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는 주장을 되새기며 추악한 현실에 굴하지 않는 희망의 불씨로 삼았다.
한국학 교수가 쓴 책 ‘중용, 조선을 바꾼 한국의 책’은 중용이 조선의 역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구체적 사례로 설명하며 조선 시대의 정치 사상사를 정리했다. 조선 초의 ‘중용’은 성리학적 통치철학의 정수를 제공했고 16세기 이후 불붙은 형이상학적 관심 속에서는 선비들의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줬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중용에서 강조한 예(禮)의 가치가 재발견돼 새로운 사상의 토대가 됐다. 하지만 인조 때의 젊은 학자로 만난 송시열과 윤휴는 ‘중용’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며 틀어지기 시작한 관계가 국가적 현안이던 북벌론에 대한 입장차로 벌어져 급기야 서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임금이 곧 백성의 스승인 군사(君師)이길 바랐던 성리학자들의 꿈은 영조, 정조 때 이르러서야 실현됐다.
저자는 “중용이란 사물의 본질에 닿아있으면서도 가장 적절하고 평범해 보이는 사고와 행동”이라며 “가장 쉽고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중용을 지키며 사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선비들은 사회 변화나 중요한 현안에 당면할 때마다 ‘중용’에서 답을 찾곤 했다”면서 “‘중용’은 당대의 현실에 어울리는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는 저자의 말이 조언으로 읽힌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