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남북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쪽 땅을 밟는 퍼포먼스와 53분간의 미북 정상회담 아닌 ‘정상 간 면담’이라는 사상 초유의 ‘리얼리티 쇼’가 막을 내리고 보름이 지났다. 놀라움과 흥분이 가라앉은 지금 냉정히 따져보면 북한의 비핵화는 1년 전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과 비교해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달 중 열릴 것이라고 예고된 실무회담에서도 쉽사리 풀릴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원인은 첫째, 비핵화에 대한 미국과 북한의 개념이 여전히 다르다는 데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물질, 핵시설, 핵무기, 운반수단(미사일)을 검증 가능한 방식으로 모두 폐기하는 데 더해 생물·화학무기까지도 없애는 것을 비핵화의 개념으로 정의하고 있다. 북한은 명확히 입장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조선반도 비핵화’ 개념에는 남한 내 미군 핵무기 공개, 남한 내 모든 핵무기와 핵기지의 철폐 및 검증, 미국 핵 타격수단의 대한반도 전개 중단, 북한에 대한 핵 불사용 확약, 핵 사용권을 가진 주한미군 철수 등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입장 차이가 지난 2월 하노이회담의 결렬을 가져온 것이고 따라서 비핵화 개념의 합의 없이는 미북 간 협상은 원점을 맴돌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원인은 흔히 ‘빅딜’ ‘스몰딜’로 얘기되는 합의를 만들고 이행해나가는 방식의 차이에 있다. 미국은 지난 25년간 북한과의 협상 경험을 통해 부분적 합의와 단계적 이행방식이 모두 실패했다는 교훈을 토대로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를 포함한 포괄적 합의 후 이를 동시적·병행적으로 이행해 나가는 로드맵을 만들 것을 요구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의 신뢰 수준에서 우선 가능한 것을 합의하고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이행한 후 다음 단계를 협상하는 점진적 방식을 주장한다. 하지만 상호 합의된 최종 목적지와 이에 이르는 지도 없이는 결국 과거 북미 제네바합의나 6자회담 9·19공동선언처럼 중도에서 멈춰 설 가능성이 농후하다. 영변 핵시설 폐기에서 그치면 비핵화는 물 건너가고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남는 것이다.
영변 핵시설의 가치에 대한 평가도 북미 간 협상의 발목을 잡는 원인이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하노이에서 영변 핵시설의 전면적인 폐기를 대가로 핵심 안보리 대북제재의 해제를 요구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과도한 요구라고 거절했다. 우리 정부는 최근 영변 핵시설의 영구 폐기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입구라고 높은 가격을 매겼지만 북한이 한 개의 핵무기도 없던 시절의 영변과 20~60기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영변 이외 지역에서 고농축 우라늄을 계속 생산하고 있는 현재의 영변의 가치가 같을 수 없다. 영변의 실제 가치는 비핵화 개념에 합의하고 이행 로드맵이 만들어져 북한 핵프로그램의 전모가 드러나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무엇을 숨겨놓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영변의 몸값을 올려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실무회담이 열려도 북한이 호락호락하게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금물이다. 지난해 7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3차 방북에서 양측은 비핵화 논의를 위한 실무그룹 구성에 합의했지만 북한은 7·7 외무성 담화를 통해 “폼페이오 장관의 강도적 비핵화 요구”라고 쏘아붙이고 회담에 응하지 않았다. 올해 2월 하노이 정상회담을 앞두고서야 겨우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의 방북 등 실무협의가 이뤄졌지만 비핵화 문제에 대해서는 한치도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대책 없이 열린 정상회담의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김 위원장이 내년 미국 대선 이전에 백악관으로 가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이를 위해 미국이 비핵화 목표를 수정해 북한의 핵포기가 아닌 핵동결을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다. 현재로서는 믿기 어려운 얘기들이지만 판문점 미북 정상회동이 ‘리얼리티 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번에야말로 비핵화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한다. 우리 정부도 옆 방 구경꾼이 아니라 당사자로서 두 눈 부릅뜨고 달려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