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현지시간) 오후 키르기스스탄 수도 비슈케크의 키르기즈국립대학교 강당. 이낙연 국무총리와 한국 수행원, 현지 학교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얀 티셔츠에 검은 바지를 맞춰 입은 학생들이 줄지어 무대에 올랐다.
참석자들의 시선이 무대에 집중 되는 순간 장내에 아리랑 선율이 흘러나왔다. 1930년대 키르기스스탄으로 강제 이주 된 한인들이 고국을 그리며 밤낮으로 구슬프게 불렀을 우리 민요 아리랑을 학생들은 맑은 목소리로 합창했고, 분위기는 다소 숙연해졌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리랑이 끝나자 곧바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K팝 1세대 아이돌그룹 동방신기의 ‘풍선’을 가벼운 율동과 함께 경쾌하게 부르기 시작했다. 참석자들은 다 함께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동북아 끝에 위치한 한국과 중앙아 한복판의 키르기스스탄 간 거리감이 확 줄어드는 순간이었다.
이날 행사는 이낙연 국무총리의 키르기스스탄 공식 방문에 맞춰 준비됐다. 키르기즈국립대는 최근 한국어를 정식 전공 언어로 채택했다. 그간 키르기즈국립대에서 러시아어·중국어·영어·프랑스어·독일어·체코어·폴란드어·아랍어·일본어 등은 정식 언어 전공이었지만 한국어는 부설 센터 등의 강좌를 통해서만 학생들이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한류 확산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현지인들 사이에서 급격히 커지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수요가 늘면서 키르기즈국립대는 한국어도 정식 전공으로 채택했다.
학생들 유창한 한국어…참석자들 모두 놀라
학생들은 합창 뿐 아니라 ‘우리가 한국에 바라는 것들’ 등의 발표를 통해 유창한 한국어를 자랑했다. 학생들이 발표하는 동안 스크린에는 한류 드라마 ‘도깨비’ ‘꽃보다 남자’ 등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 총리는 “대한민국 총리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고 학생들을 칭찬했다.
이 총리는 “키르기즈국립대가 한국어 전공을 신설해 줘서 감사하다”며 “키르기즈국립대의 한국어 전공을 대한민국은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총리는 “한국어를 담은 문자 한글은 누가, 언제, 왜, 어떻게 만들었는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문자”라며 “노벨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 펄 벅은 ‘한글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자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말했다”고 말했다.
또 이 총리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것”이라며 “학생 여러분은 지금 새로운 세계를 만나려 하고 계신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총리는 “여러분의 앞날에 더 넓고 빛나는 세계가 펼쳐지기를 바란다”며 “여러분이 키르기스스탄과 한국의 가교로 일해주실 날을 고대하겠다”고 말했다.
초중고 통합 학교 61곳, 15개 대학서 한국어 수업
키르기스스탄에서는 한국인과 닮은 얼굴을 한 현지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현재 키르기스스탄에는 약1만7,000명의 고려인이 거주 중이다. 1937년 강제 이주 된 한인들의 후손 2~4세대 고려인들이 동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정관계, 기업계, 학계, 문화계 등에도 폭넓게 진출해 있다.
이에 이 총리는 키르기즈국립대 행사에 앞서 열린 양국 비즈니스포럼에서 “어느 쪽이 한국 분이고, 키르기스스탄 분인지 구분이 잘 안 된다”는 말로 연설을 시작하기도 했다.
키르기스스탄에서 한국어 열기가 높은 건 고려인 후손들의 활발한 현지 활동 때문 만은 아니다. 한국 음악, 영화, 드라마 등이 인기를 끌면서 청년들 사이에서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현지 우리 공관은 매년 ‘춘계 및 추계 한국문화제’ 기간을 정해 K-팝 페스티벌, 한국영화제, 태권도대회, 한식 행사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그 때 마다 현지 최대 규모 공연장이 늘 만석이라는 게 현지 공관 측의 전언이다.
또 현재 초중고 통합학교 61곳에서 5,800여 명의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 강의가 개설 된 대학도 15곳에 이른다. 현지 한국어교육원(2,800여 명)과 비슈케크와 오쉬의 세종학당(1,000명)을 통해서도 한국어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카나트 사디코프 키르기즈국립대 총장은 “최근 한국어에 대한 청년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있다”며 “외국어학부에 한국어 전공을 신설함으로써 훌륭한 한국어 전문가가 양성될 것이라 믿는다”고 말했다.
/비슈케크=정영현기자 yhchu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