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64년 로마 대화재, 네로 소행?

황제의 기독교 박해 시작

로마 카피톨리노박물관이 소장한 네로 황제 흉상./위키피디아로마 카피톨리노박물관이 소장한 네로 황제 흉상./위키피디아



64년 7월19일 밤, 로마. 대형 경기장 아래 상점에서 시작된 불이 삽시간에 도시를 삼켰다. 한여름 밤 가뜩이나 달궈진 공기를 탄 불길은 빈부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맹렬하게 번졌다. 중하층 시민들이 다닥다닥 모여 사는 5~6층 목조 공동주택부터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재 당시 아홉 살이던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연대기’에 이런 기술을 남겼다. ‘위용을 자랑하던 로마제국은 불길에 휩싸이고 시내는 공포와 죽음의 지옥이 되었다.’ 로마의 소방수 7,000여명이 사력을 다해 아직 불타지 않은 건물을 미리 부순 통에 화재 발생 엿새째야 불길을 겨우 잡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화했다는 기쁨은 순간에 그쳤다. 강풍으로 살아난 불씨가 번져 도시를 사흘간 더 태웠다. 인구 130만여명이 몰려 살던 로마의 14개 행정구 가운데 3개 구가 전소하고 7개 구는 절반 정도 화마를 입었다. 온전한 행정구역은 4개뿐이었다. 9일 동안 서구사회의 중심을 태운 로마 대화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분명하지 않다. 오랜 세월 동안 떠돌던 여러 설 가운데 가장 자극적인 해석은 네로 황제의 방화설. 원로원의 반대를 물리치고 로마를 새로 건설하려고 네로의 측근들이 불을 놓았다는 것이다. 한밤을 붉게 물들인 화광을 보고 네로가 악기를 켜며 시를 지었다는 말도 나돌았다.

관련기사



과연 그랬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발화설에 무게가 실린다. 화재 당시 로마에서 50㎞ 떨어진 해변도시에 머물던 네로는 즉각 돌아와 진화 작업과 이재민 보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네로를 비판적 시각으로 묘사했던 타키투스도 이재민을 구제하려는 황제의 노력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네로는 식료품 가격을 3분의1 수준으로 내리고 통화의 질을 낮춰 재원을 마련했다. 금화와 은화의 순도를 5% 떨어뜨리며 통화공급을 늘린 것이다. 로마를 뜯어고치겠다는 계획도 처음에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인명피해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는 로마 대화재와 관련된 진실은 딱 하나다. 황제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방화설이 퍼지고 황제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자 네로는 국면전환용으로 로마에 거주하던 기독교인 약 3,000명 가운데 10%를 잔혹하게 죽였다.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에게 1905년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소설 ‘쿠오바디스’의 주제가 바로 로마 대화재와 기독교 박해다. 네로는 화재 직후 궁전 재건축에 열을 올려 로마시민들의 미움을 사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쳤다. 공감능력을 상실한 권력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