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7년 7월22일, 영국인 115명을 태운 배 3척이 로어노크에 닿았다. 오늘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대서양 연안에 있는 로어노크는 우리나라 대부도보다 약간 큰 섬. 영국 배들은 중간기착지인 이곳에 정착민을 내려놓았다. 휴식과 확인을 위해서다. 정착민들은 휴식을 취했지만 확인할 수는 없었다. 3년 전 이곳에 닿았던 1차 정착민이 철수하면서 남겨놓은 군인 15명이 사라지고 해골 1구만 남았다. 1차 정착 실패에도 2차 정착민이 다시 온 이유는 간단하다. 돈.
영국의 북미 식민지 개척사업은 한 인물의 의지대로 흘러갔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총애하는 신하였던 월터 롤리는 1584년 식민지 개척에 대한 칙허를 얻은 직후 탐사대를 먼저 보냈다. 식민지의 조건은 세 가지. 자급자족이 가능하고, 금광 개척에 적합하며, 스페인 선단을 약탈하는 사략 선단의 출항기지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탐사대는 적합한 장소를 찾아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 처녀 여왕의 땅’이라는 의미다. 롤리는 병사 400여명과 정착민 108명을 1585년에 보냈지만 모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식량 부족, 원주민과의 갈등 탓이다.
‘북미 식민지 개척이 어렵다’는 소문이 퍼져 이주자 모집이 어려워지자 롤리는 새로운 당근을 꺼냈다. 이주하는 가구당 농지 500에이커(약 61만평)를 무상 분양한다는 약속을 믿었던 2차 정착민들은 중간기착지로 여겼던 로어노크섬에 발이 묶였다. 기상이 나빠져 당초 식민 예정지로 꼽았던 북쪽의 체사피크만으로 항해할 수 없었다. 결국 로어노크섬에 머물며 영국에 배를 보내 식량을 조달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앞둔 영국이 발동한 전 선박 출항금지령. 스페인 무적함대에 맞서려고 작은 선박까지 영국 항구에 대기시켰다.
결국 식량을 실은 영국 배는 3년이 지나서야 돌아왔으나 로어노크섬 사람들은 사라졌다. 전쟁이나 습격의 흔적도 없고 가재도구나 옷가지도 그대로 남긴 채 사람들만 없어졌다. 기둥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단어(CROATOAN) 하나만 남긴 채 사람이 증발한 이 사건은 아직도 미스터리의 영역에 머문다. ‘잃어버린 식민지’ 로어노크가 영국에 남긴 것은 1차 정착민의 귀환 짐에 묻어왔다는 감자뿐이다. 영국의 식민사업은 1607년 제임스타운 건설로 이어졌으나 미국인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 상륙을 미국사의 공식적인 시작으로 여긴다. 원주민을 비롯해 역사의 뒤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패자를 위한 진혼곡을 울리고 싶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