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1656년 렘브란트 파산

빚의 덫에 걸린 '빛의 화가'

렘브란트 자화상렘브란트 자화상



1656년 7월26일, 암스테르담. 저명화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당시 50세)이 신용불량자 명단에 올랐다.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한 탓이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고 전해진다. 명성이 다소 시들었어도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에다 유산도 많았던 렘브란트가 파산하다니!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렘브란트의 초년은 탄탄대로. 레이던대 입학 직후 부모의 반대를 뚫고 학업 대신 선택한 그림에서 두각을 보였다. 인생의 절정기는 1632년. 명문가의 딸과 결혼해 막대한 지참금을 챙겼다.


결혼 무렵 최초의 집단 초상화로 불리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교실’을 그렸을 즈음에는 귀족들이 그의 초상화를 얻기 위해 줄을 서 기다렸다. 문제는 씀씀이가 너무 컸다는 점. 화구와 고서적이며 소도구와 골동품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암스테르담 고급주택가에 5층짜리 저택도 은행 대출로 사들였다. 불행은 예술과 가정, 금전의 세 방향에서 차례차례 들이닥쳤다. 1646년 발표한 ‘야경(The Night Watch)’은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빛의 대조와 반사가 제각각이라는 비우호적인 비평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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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던 아내도 셋째를 낳다 출산 후유증과 결핵으로 사망해 40세의 렘브란트는 더욱 실의에 빠졌다. ‘야경’에 대한 악평으로 작품 가격이 떨어지자 두 가지 방편으로 맞섰다. 다작(多作)과 직판. 미술품 경매회사를 세워 소비자들과의 직거래를 꾀했다. 부와 권력을 지닌 귀족의 후원에 의존하는 자유계약직 같았던 화가들이 제값 받고 그림을 팔겠다는 의도였지만 여기저기에서 견제해 성공하지 못했다. 다작으로 작품 가격이 더욱 떨어져 렘브란트는 결국 파산을 선언하고 말했다.

렘브란트가 세운 경매회사는 빛을 못 봤다. 반면 빚쟁이 렘브란트의 저택은 1658년 은행들에 의해 경매로 넘어갔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아들이 27세로 사망(1665년)한 뒤 4년 후 렘브란트는 굴곡진 생을 마쳤다. 향년 63세. 정상에서 하류 생활까지 진폭이 컸기 때문일까. 렘브란트에 대한 해석도 다양하다. 미술품 거래회사를 세워 경매제도를 선보여 귀족의 전유물이던 예술을 대중에게 선사한 선구자라는 평가와 졸부 근성, 하녀를 임신시키고 정신병원에도 보낸 철면피라는 해석이 상존한다. 분명한 사실은 세상은 그를 ‘빚의 화가’보다 ‘빛의 화가’로 기억한다는 점이다. 정말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가 보다. 렘브란트의 그림에 담긴 빛의 가격도 갈수록 올라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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