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 7월30일 북미 세인트로렌스 강변. 프랑스 탐사대와 원주민 부족이 맞부딪쳤다. 사뮈엘 드 샹플랭(당시 42세)의 프랑스 탐사대는 휴런족 60명을 포함해 63명. 적대적 부족을 찾아 겁을 줘 회유하려던 샹플랭은 하우데노사우니족 250여명에 둘러싸이자 지도자 3명을 향해 화승총을 쐈다. 한 방에 2명이 즉사하고 나머지 1명도 프랑스 병사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원주민들은 흩어지면서도 보복을 다짐했다. 이날의 사건은 북미 5대호 주변의 단순 충돌에 그치지 않고 154년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최종 승자 영국은 북미의 지배권을 확보했으나 수십만 명의 원주민이 희생됐다. 인간보다 훨씬 많이 죽은 개체도 있다. 비버(beaver).
싸움의 발단 역시 비버였다. 프랑스가 이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1534년. ‘캐나다’라는 지명을 지은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원주민들과 모피 교역을 시작한 게 시초다. 북미산 모피는 두 가지 용도로 각광 받았다. 첫째는 대구잡이 어부들의 보온 담요. 뉴펀들랜드 인근 바다에 넘쳐나는 대구를 잡아 유럽까지 운반하는 과정에서 거친 북대서양의 추위와 파도를 견디는 데 비버 가죽만 한 방한구가 없었다. 둘째는 유행. 파리를 시작으로 비버 가죽 모자와 외투가 인기를 끌자 더 많은 유럽인이 모피로 돈을 벌려고 북미에 들어왔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물론 모피 수출에 타격을 받은 러시아까지 끼어들었다.
원주민들도 수요 증가에 들뜨기는 마찬가지. 필요한 수량만 사냥하던 생활 습성을 버리고 총과 화약·술을 사려 비버 가죽을 모았다. 부족끼리 경쟁이 붙어 사이도 나빠졌다. 일찌감치 모피 교역의 맛을 본 휴런족과 알곤킨족은 경쟁 부족인 이로쿼이·하우데노사우니족을 쳐주면 더 많은 모피를 얻을 수 있다고 프랑스를 꼬셨다. 샹플랭의 자의 반, 타의 반의 원주민에 대한 총격은 분노를 낳고 후발주자인 영국이 틈새에 끼어들었다. 영국은 이로쿼이·하우데노사우니족을 교사해 이로쿼이 연맹을 결성, 국가로 인정하고 프랑스와 싸우도록 부추겼다. 이로쿼이 연맹과 다른 원주민 부족 간 비버 전쟁에서 1720년까지 남획당한 비버는 200만마리가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과 프랑스를 낀 북미 원주민 간 비버 전쟁의 대결 구도는 7년 전쟁(1756~1763년)까지 이어져 프랑스는 북미(캐나다)의 지배권을 잃었다. 샹플랭이 한 발의 총알로 원주민 2명을 사살한 ‘원 샷 투 킬’은 결국 우호 부족은 물론 프랑스까지 죽인 시초였던 셈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한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