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기반인 노조와 시민단체를 극복하지 못하니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기업과 민간에 힘을 실어줘야 할 때입니다. 최저임금 1만원과 원자력발전소 건설 백지화 공약 등 기존 발표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정석인하학원 집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난 현정택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반환점을 향해 가는 문재인 정부에 지지기반을 뛰어넘는 경제정책을 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 전 수석은 “노동시장에서 유연성과 안정성이 같이 가야 하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노동 관련 정책 변화를 촉구했다. 특히 그는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규제의 절반을 폐지하라”고 지시한 사례를 떠올리며 경제는 민간이 한다는 원칙을 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 전 수석은 경제기획원에서 잔뼈가 굵은 정통 경제관료 출신으로 여러 정부에서 정책조율 업무를 총괄했다. 그는 김대중(DJ) 정부에서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을, 박근혜 정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과 정책조정수석을 역임하며 타협하지 않는 소신과 원칙을 보여줬다. 현 전 수석은 본지 창간 특별 인터뷰에서 어려운 경제여건에 대한 해답을 ‘기업과 민간’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언했다. 민간을 지원하기 위해 기업을 옭아매는 규제를 확실하게 풀어줘야 한다면서 과거 DJ 정부 경제수석 시절의 일화를 꺼냈다. 현 전 수석은 “외국인투자가 150여명을 영빈관에 불러 규제를 줄여줄 테니 한국에 와서 돈을 많이 벌고 세금도 많이 내라고 북돋았다”며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부처별로 있는 규제의 절반을 무조건 폐지하라고 우선 지시한 후 그 뒤에 방법론을 논의할 정도로 강경했다”고 회상했다. 관계부처에서 규제 ‘개선’이면 몰라도 절반을 폐지는 힘들다고 난색을 표했으나 대통령의 지시가 결국 본질을 달라지게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새로운 경제 성장동력을 찾는 과정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정부가 나서 신산업을 선정하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현 전 수석의 생각이다. 그는 “육성해야 할 성장산업을 지정하는 것은 과거 정부에서도 다 했다”며 “외국의 한 전문가가 ‘몇년 뒤 해당 산업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한국 정부에는 신적인 능력이 있는가’라고 말했을 정도”라고 꼬집었다. 이어 “재작년 미국에서 드론을 자동허가제로 바꾸면서 관련산업이 발달했다”며 “빅데이터나 자율주행차 등에서 민간이 구체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공유경제나 타다 등 혁신산업 등장으로 기존 산업과 빚는 갈등은 국가에서 중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 전 수석은 “신산업 준비를 촉진하는 방법은 몇년 뒤부터 허가해주겠다고 예고하고 이를 시행하는 것”이라며 “그렇다고 서울시의 제로페이처럼 경제적 지대에 공공 부문이 앞장서 뛰어들고 세금 특혜를 주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일”이라고 진단했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기업 운영을 위해 유연성이 필요한 분야가 있는데 현 정부 들어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 근로제 도입 등이 획일적으로 강화되고 있는 점을 우려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주 52시간 제도에 대비해 판교에 있는 정보기술(IT) 기업이나 반도체 연구개발(R&D) 분야 등은 탄력근무제를 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등 국책연구기관 수장을 두루 맡았던 ‘경제통(通)’인 현 전 수석은 우리나라가 처한 경제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대외적으로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수출규제, 오는 10월 결정될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까지 우리를 둘러싼 여건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미중 갈등처럼 경제와 정치를 묶어 패권을 다투는 구조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 (우리에게)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전문가가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2.2%의 경제성장률을 지킬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면서 “금리를 낮추고 추가경정예산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얼마나 사이클 극복을 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특히 일본의 수출규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간 교류를 지속하는 상태에서 정부 대 정부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이 지금처럼 서로 다른 형식논리를 고집하면 문제를 풀기 어렵다는 의미다. 현 전 수석은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일본의 경제보복이 연계돼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양 정부가 이를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지적했다. 또 “현재의 갈등은 양국 정부가 허심탄회하게 연결돼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며 “민간에서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일본에 얼마나 타격을 줄지는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약 한달간 이어진 일본 불매운동은 맥주와 패션·화장품은 물론 자동차와 의약품·호텔 등으로까지 확산하고 있다. 현 전 수석은 “방탄소년단(BTS)의 사례처럼 스포츠와 문화 교류를 활발히 하는 것이 오히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압력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불매운동이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는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를 나타냈다. 일본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맞대응이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본질을 부각하고 접근하는 데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제3국의 중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현 전 수석은 “일본은 강제징용과 수출규제가 별개 문제라고 주장하고 우리도 수출관리 제도를 WTO 제소로 맞서면서 강제징용은 사법부 판단이라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며 “양국의 주장이 거의 같은 내용이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현 전 수석은 일본이 수출을 규제한 반도체 관련 부품·소재 산업 자립화 등은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점도 분명히 했다.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로 삼아야 하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부품·소재 산업 육성은 5년, 10년 전에 했어야 할 이야기이다. 지금 강조해서 개발된다면 얼마나 쉽겠는가”라며 “현 상태가 1년을 넘긴다면 밸류체인(분업구조)이 무너지며 일본도 엉망이 되겠지만 우리 산업 역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대외적으로 겪는 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다. 미중 무역전쟁이 촉발한 자국 우선 보호무역주의가 전 세계로 퍼지면서 대외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도 결국 이런 변화의 흐름에서 일어난 사태라는 판단이다. 현 전 수석은 “무역의 문을 여는 것이 각국에 득이 된다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방식이었다”며 “세계가 바뀌면서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제로섬 게임으로 무역 흐름이 돌아갔다”고 분석했다. 국제통상 질서가 재편되는 현 상황이 단순히 경제 문제로 촉발된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미중 간 싸움도 앞으로 먹고 살 것을 휘어잡기 위해 미국이 어떻게든 관세로 때려잡겠다는 것”이라며 “경제와 외교·안보가 묶인 패권 전쟁이 펼쳐지는 상황이 돼버려 우리나라로서는 상당히 어려워졌다”고 전했다.
현 전 수석은 우리나라 경제가 어떻게 활로를 찾아가야 하는지를 묻자 “우군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명료하게 답했다. 개별 국가와의 자유무역협정(FTA)을 확대하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같은 경제권역별 협정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려 했던 수입차 관세 면제 폐지 등을 지켜내고 있다”며 “마찬가지로 미국과 같은 우군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중국과 상품별 FTA는 많이 됐는데 서비스·투자 등도 협정을 맺어야 한다”며 “CPTPP도 일본 문제를 핑계 삼아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거의 모든 경제전문가는 협정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조언했다.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해 경제 블록화가 발생하면 우리나라로서도 좋든 싫든 특정 경제동맹으로의 재편이 강요되는 상황이 올 수밖에 없어 최대한 선택지를 넓혀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정리=황정원·정순구기자 soon9@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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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경북 예천 △1967년 경복고 △1971년 서울대 경제학과 △1971년 행정고시(10회) △1995년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1998년 대통령비서실 기획조정비서관 △2001년 여성부 차관 △2002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2003년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200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2010년 무역위원회 위원장 △2013년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2015년 대통령비서실 정책조정수석비서관 △2016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원장 △2019년 정석인하학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