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노동부가 지난달 31일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에 따르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실업자(또는 해고자)의 노동조합 가입 금지나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2년 제한 등 노사관계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노사자치의 영역을 확대하는 방향이다. 개정안 항목을 뜯어보면 노사관계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어놓는 큰 개혁이라기보다는 시대 변화에 맞게 노동규제 일부를 합리화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국내 경영 현실을 외면한 무리한 시도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민주노총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결사항전을 외치고 있다. 이런 과장된 노사의 행동은 정부가 자초한 측면도 있다. 정부가 이 문제를 ILO 협약 비준과 그에 따른 노동조합법 개정으로 한정하지 않고 마치 이를 계기로 노사관계가 크게 변하고 노동존중 사회가 새롭게 열릴 것처럼 이슈를 키웠기 때문이다.
정부는 당초 약속대로 ILO 협약 비준 방침을 밝히고 이에 따르는 법 개정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정부안을 만들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정부가 대통령의 의지까지 실어가며 노사 대타협으로 풀겠다고 나서자 노사의 기대치도 한껏 높아졌다. 몇개월간 진행된 경사노위 협상 테이블에서 노사는 문제 해결 중심의 실용적 자세가 아니라 대타협을 빌미 삼아 자신의 요구를 하나라도 더 관철하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일관했다. 경영계는 파업 기간 중 대체근로같이 노동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를 계속했고 노동계는 ILO 협약 비준 이외의 어떤 제도 개선도 논의 대상이 아니라는 견해를 고수했다. 이런 구도에서 대화와 타협은 결실을 거둘 수 없다.
그러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던 실업자의 조합원 자격 문제는 벌써 20년 전에 해결했어야 할 밀린 숙제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1998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에서 노사정이 합의했지만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해 미루고 미뤄 오늘에 이르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경영계는 소속 근로자도 아닌 자가 조합원 자격을 얻어 기업 단위에서 벌어지는 교섭과 파업에 가담하는 최악의 상황을 우려한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이고 냉정히 말해 노사 스스로 단속해야 할 일탈 행위다. 현실의 노사관계 맥락에서 보면 법적 변화의 혜택은 오히려 전교조에 돌아간다. 2013년 전교조는 해직교사 9명을 조합원으로 두고 있다는 이유로 14년 동안 누려왔던 노조 지위를 갑자기 잃었고 이를 계기로 한동안 묻혀 있던 해고자의 노조 가입 문제가 첨예한 쟁점으로 되살아났다. 이는 노사 타협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기관이 결정을 해줘야 할 문제다.
이 밖에 개정안에는 몇가지 제도 개선사항이 담겨 있다. 경영계가 요구한 단체협약의 유효기간 연장과 파업 중 생산시설의 점거 금지 등도 포함됐다. ILO 협약 비준을 핑계로 경영계 요구사항을 끼워 넣었다는 노동계의 비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꿔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으로 남아 있는 낡은 노동규제를 합리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예컨대 파업 노동자의 사업장 점거는 과거 사업장 밖의 집회·시위가 금지됐을 때 형성된 잘못된 관행에 불과하다. 또 단체협약의 유효기간(2년)이나 노동조합 임원의 임기(3년)를 법으로 정하는 것도 과거의 관행일 뿐이고 노사자치의 가치와도 배치된다. 이런 관점에서 법 개정 이유를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에서 찾을 게 아니라 국제사회의 보편규범에 따라 노동규제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하면 좋겠다. 무역에 관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국제규범을 존중하듯이 노동에서도 ILO의 보편규범을 존중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덧붙이자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고 노동조합법이 개정된다면 한국노동운동 특히 민주노총이 전투적 투쟁주의 노선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끊임없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며 비타협적 투쟁노선을 버리지 않는 한 노동존중 사회는 더 어려워진다. 어떤 분노와 갈등도 법과 제도의 틀에서 풀어낸다는 결심이 없다면 노동존중 사회의 책임 있는 파트너로 대접받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