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동안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발을 걸치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전략을 펴왔습니다. 그러나 자유무역체제로 대변되는 세계는 지금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디는 힘이 더 세지 못하다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최병일 국제경제학회장(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국제관계에서 지난 2016년 이전의 평화로운 시기는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하고 영국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를 결정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자유무역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두 차례의 끔찍한 참상을 겪으면서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만든 국제기구가 그 시스템을 주도한 나라에 의해 허물어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정책결정자들도 이 같은 인식 아래 냉정하게 우리의 좌표를 찾아내고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 협상의 주역으로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던 통상·국제관계 전문가인 최 학회장에게 다층적 위기의 해법을 물어봤다.
-구한말처럼 미·일·중·러가 한반도에서 다투는 형국이다.
△그때는 스스로 지킬 힘이 없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 6위권 수출국이다. 경제발전·선진화·민주화가 어느 정도 결실을 맺은 상황이어서 우리 힘이 약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주변 나라의 각축에 이리저리 밀리는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주변 정세의 변화는 2016년 이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국제체제의 구조적 변화에서 기인한다. 미국과 영국은 2차대전 후 공산 진영에 맞서 냉전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유 진영과 반공산국가를 한 블록에 집어넣어 자유무역·투자를 통해 번영을 추구했다. 이제는 과거 미영이 주도해 쌓아올렸던 ‘규범에 기반한 다자 자유무역체제’가 퇴장하고 있다.
-자유무역체제 퇴조의 배경은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다. 미국과 영국 등 세계화에 앞장선 국가들의 국제 리더십 약화와 함께 이들 국가 내부의 양극화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더 이상 권위주의 국가에 대한 포용책을 펼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미국은 1980~1990년대 일본의 도전을 받은 후 추격을 뿌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21세기 들어 중국의 부상으로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자유무역주의 깃발을 처음 들어 올린 영국도 2016년 브렉시트를 결정했다. 유럽연합(EU) 체제 하에 동유럽의 저임 노동자들이 영국으로 몰려와 일자리를 빼앗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두 나라는 또 내부적으로 디지털 경제계층과 굴뚝 산업의 노동자계층 간 격차가 너무 커졌다. 냉전 이후 미국은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를 자유경제체제에 편입하면 국제규범을 준수하는 국가로 변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미중 무역전쟁은 이 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빚어졌다.
-일본이 징용문제로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에 나섰다.
△일본은 서구를 빠른 시간에 배워 아시아 최초로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아시아의 패권이 일본에 넘어왔다는 게 일본 정치 엘리트들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청일전쟁 이후 120년간 동아시아의 맹주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2010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일본을 추월하자 굉장한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 플라자합의 이후 잃어버린 20년의 세월을 보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요2개국(G2)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 자리를 중국에 빼앗기고 만 것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전쟁을 할 수 없도록 만든 평화헌법의 개정을 추진하는 것도 이 같은 위기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중국을 막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기고 있다. 일본의 보복은 단기적으로는 강제징용 등 과거사 문제가 걸려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이런 세계질서 변화 속에 빚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
-일본의 보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한국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라고 하는데 일본은 이미 다 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망언이 나오고 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하지만 과거사 문제를 경제발전이나 생존의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국내 정치에서 시작된 외교의 문제인데 경제전쟁의 문제로 푸는 것은 잘못된 대응이다. 잘못 대응하면 우리의 안보·경제환경이 크게 훼손될 수 있고 후세대의 생존기반은 매우 취약해질 수 있다. 냉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다. 외교적 접근으로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의 본질은 패권경쟁이다. 누군가 확실한 승자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미중 경쟁은 21세기를 관통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미국이 유리한 수단을 갖고 있지만 두 가지 변수가 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상대의 급소를 빨리 치든지, 아니면 지구전에서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장기전으로 갈 경우 중국에 유리할 수도 있다. 미국은 2년에 한 번씩 선거를 치러야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 독재라 억누르면 국민들은 삶이 힘들더라도 감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와 중국 경제 모두 힘들어지면서 전 세계가 동반 하강 국면에 빠질 수도 있다.
-중국 경제를 어떻게 보나.
△경제를 쉽게 얘기하면 인풋(input)을 아웃풋(output)으로 바꾸는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으로 선회한 후 인풋을 가속적으로 늘렸다. 많은 농민을 노동자로 바꾸고 공장을 만들 수 있도록 서구와 한국·일본의 자본을 들어오게 했다. 블랙박스도 공산당 통제경제에 시장경제를 접목했다. 그렇게 해서 10% 성장을 30년이나 했다. 그렇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후진국 수준에 머물렀다. 21세기 들어오면서 저부가가치에서 기술집약도가 높은 쪽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1997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엄청난 재정을 풀었다. 그러면서 부채가 중국경제 곳곳에 쌓였다. 소외된 내륙지방 등에 투자는 많이 했는데 엄청난 부실이 쌓였다. 효율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성장률이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시진핑 주석이 집권할 때 이미 구조적인 하강기가 시작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세계 경제학자들이 다음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오면 진원지는 중국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시장과 공산당이 공존하는 정부가 끌고 나가는 독특한 경제체제를 여러 방법으로 잘 틀어막아 온 것이다. 그런 상황에 미중 무역전쟁이 터졌다. 두 가지가 겹치며 중국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성장을 하기 어렵게 됐다. 중국의 미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4억 인구이니 연 4%만 성장해도 10년 내 경제 규모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 반면 중국이 효율성을 제대로 높이지 못하면 중진국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인민들의 불만이 쌓여 중국이 어떻게 흘러갈지 아무도 모른다.
-중국이 민주화하면 아시아가 좀 더 협력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국의 민주화는 없을 것이다. 많은 나라에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잠깐의 정권 교체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주도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도 대체세력이 없어 혁명을 하더라도 사회를 바꿔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제혼란이 생기면서 일부 지역이 내전을 겪을 수는 있다. 공산당이 정치개혁에 나선다고 해도 적당한 비판의 자유와 비정부기구(NGO)의 목소리를 허용해 주는 데 그칠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 경제는 어떻게 될 것으로 보나.
△트럼프가 20세기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자동차·철강 등의 회생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 굴뚝 산업은 미국에 비교우위가 없다. 지금 미국을 움직이는 것은 금융·디지털경제다. 미국 경제가 호황을 이어가려면 기업가정신이 발휘될 수 있는 기본적인 토양이 계속 제공돼야 한다. 트럼프가 계속해서 동맹에 대해 뒤에서 총질을 하고 반이민적인 정책을 유지하면 미국이 그동안 펼쳐온 개방체제·포용 시스템이 무너지게 된다. 세계 각국의 재능 있는 많은 사람이 미국에 모여 아메리칸드림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그런 미국체제가 서서히 닫히게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미국 스스로 쇠퇴할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어려워질 것 같다.
△그동안 세계 경제는 무역과 투자가 성장을 견인해왔다. 선진국에서는 유통혁신과 디지털경제로 효율성이 높아지며 서비스가 핵심이 됐다. 선진국 가운데 독일·일본 빼고는 제조업 비중이 10%를 넘는 나라가 없다. 하지만 쌓아놓은 부가 있어 잘 돌아간다. 선진국의 자본이 신흥중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돌아다니며 세계 경제의 동반성장을 이끌어왔다. 그런데 그런 게 이제 막히고 있다. 미국은 물론 중국·일본·유럽국가들도 장벽을 쌓고 있다. 보호주의 때문에 자본이 국경을 넘는 데 장애가 생기고 있다. 이럴 경우 축소균형으로 갈 수밖에 없다. 어려워지면 지역적인 갈등이 생기고 그 갈등이 국내 정치적으로 폭발하면 포퓰리즘이 득세한다. 더 나아가 지역 분쟁, 물리적 분쟁으로 갈 수도 있다. 그동안 인류가 20세기 초반의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왔는데 이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과 일본의 경제보복 등이 맞물리면서 우리 경제가 퍼펙트 스톰을 맞고 있다.
△정책을 하는 분들은 2016년 이전의 평화로운 세상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이제 국제규범이 작동했던 시대는 박물관 속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세계무역기구(WTO)나 국제연합(UN) 등 국제기구에 제기할 수 있지만 이들 기구는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다. 동맹도 국내적인 계산에 의해 우리에게 방위 분담 확대를 압박하고 동맹국이 처한 문제에도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다. 정글화되고 각자도생하는 뉴노멀(New Normal) 의 세상이 오고 있다. 생존에 포인트를 맞추고 현실주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우리 정부가 친기업·친시장 마인드를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도 많다.
△시장의 근본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생각만이라도 갖는 게 필요하다. 그래야 우파가 성장을 이끌면 좌파가 분배를 해결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그런 생각을 전혀 못하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으로 소득재분배 정책을 펴 왔지만 부정적 효과가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정책을 수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이 경제보복을 해오니 기업을 챙기겠다고 태도를 바꿨지만 본질이 바뀌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서 성장동력은 계속 훼손되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전략을 어떻게 짜야 하나.
△우리는 선진국에 진입했다. 또 제조업 강국이다. 하지만 뉴노멀 시대에서도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하려면 제조업만으로는 어렵다. 21세기에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려는 나라는 뭔가. 선진경제, 역동적인 민주주의, 인권과 비판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강건한 사회, 포용적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다. 대한민국 국제전략의 해답은 거기에 분명히 나온다. 정글의 시대에 우리의 좌표를 정확히 파악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를 세우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수단을 검토해야 한다. 현 집권세력은 우리의 가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다. 과거 역사에 매몰돼왔다.
-최근 펴낸 ‘미중전쟁의 승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미국편’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뭔가.
△많은 사람이 트럼프가 무대에서 사라지면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트럼프의 분위기를 촉발시킨 미국 내 대중의 생각 변화, 중국의 구도가 정글 시대로의 변화를 촉발시켰다. 또 미중 무역전쟁은 본질적으로 패권경쟁이기 때문에 21세기를 관통하는 전쟁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다자체제와 자유무역질서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이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는 다음 책에서 다룰 계획이다./오현환 논설위원 hhoh@sedaily.com
He is···
195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게임이론을 전공했다. 귀국해 통신개발연구원을 거쳐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서비스협상의 주역이다. WTO 기본통신협상 한국 수석대표를 역임하고 경제분야 대표 싱크탱크인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역임했다. 국제통상학회장·한국협상학회장에 이어 42대 국제경제학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 4월 출간한 ‘미중전쟁의 승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 미국편’ 등 경제·협상 분야에서 다수의 책과 논문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