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찌는 듯한 폭염에 잠시도 야외에 서 있기 힘든 14일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1,400번째 수요집회가 열린 현장에서 길원옥(92) 할머니가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 20명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령의 길 할머니는 모든 힘을 쥐어짜 시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할머니의 외침에 시민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다.
수요집회는 지난 1991년 고( 故)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고백한 후 이듬해 1월8일 처음 시작됐다. 한일관계가 경색되는 가운데 이날 1,400회째를 맞은 수요집회에는 2만여명(정의기억연대 추산)이 몰려 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졌다. ‘위안부 기림의 날’이기도 한 이날은 집회 시작 몇 시간 전부터 학생들과 시민단체·종교계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소녀상 인근으로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특히 이날 수요집회는 서울·일본·호주·영국 등 10개국 34개 도시에서 함께 열렸다.
수요집회 역사상 최대 규모였지만 참가자들의 요구는 27년 7개월 전 첫 집회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가 국가의 정책에 따라 집행된 전쟁범죄임을 인정하라”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라”가 그것이다.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은 “이곳 평화로에서는 서로 존중하고 함께 더불어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자고 해왔다”며 “김복동·김학순 등 여러 할머니의 외침이 있었기에 소중한 평화, 인권의 가치를 배웠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에 맞서 시민 단결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이어졌다. 윤경희 4·16세월호가족협의회 대외협력부장은 “최근 일본이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경제침략으로 대응하면서 국민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독립운동가처럼 싸워주고 있다”며 “이 나라가 국민을 버리지 않고 제대로 된 대응에 나선다면 일본의 반성을 받아내고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자국 정부의 위안부 대응에 항의해 집회에 참가한 일본인들도 눈길을 끌었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재학 중인 일본인 와다(35)씨는 “한국인들이 규탄하는 것의 책임은 확실히 일본 정부 측에 있다”고 주장했다. 1,400번째 수요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방한했다는 재일교포 정주나(17)양도 ‘끝까지 함께 싸웁시다’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한국을 차별하는 아베 정부를 지지하지 않는다. 집회에 모인 한국인들의 목소리를 존중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한편 이날 전국적으로 진행된 위안부 피해자 기림일 행사에 수많은 시민이 참여해 일본을 규탄했다. 경남도청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색 나비 모양 카드를 들어 올리는 행사가 열렸고, 광주 서구 청사 앞 광장에서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기념행사가 열렸다. 부산 지역 시민단체도 기념행사를 열고 “일본 정부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인정하고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이루는 그날 진정한 해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북 지역 상인 1만6,000명이 가입한 전북상인연합회는 전북도의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베 정부의 부당한 조치에 맞선 민간 차원의 무역보복 저지 운동에 혼신을 다해 참여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허진·이희조기자 hj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