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IT

지형 제약 극복하려 만든 터널…'보행친화 도시' 추세에 사라질까

[최형섭의 테크놀로지로 본 세상] <3>터널의 명과 암

이동·운송 편리성 추구한 테크놀로지

韓도 근대화 거치며 우후죽순 생겨나

전국 2,566개 총거리 1,897㎞ 달해

터널옆 보행로 매연·소음 '불쾌한 곳'

親보행 문화 확산에 고가도로 없애듯

도심속 터널, 어떻게 변화할지 주목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9년 3월 남산1호터널 기공식을 진행하는 모습. 이듬해 6월까지 완공하겠다는 목표로 10억1,400만원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공사예산을 편성했다. /사진출처=<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Ⅱ: 1968-1970>김현옥 서울시장이 1969년 3월 남산1호터널 기공식을 진행하는 모습. 이듬해 6월까지 완공하겠다는 목표로 10억1,400만원의 민간자본을 유치해 공사예산을 편성했다. /사진출처=<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Ⅱ: 1968-1970>



네다섯 살 정도 먹었을 때의 기억이니 1970년대 후반쯤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한강 남쪽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은 서울시청 뒤쪽 소공동 부근이었다. 두어 달에 한 번 정도 어머니는 아버지와 저녁 외식을 할 약속을 잡았던 것 같다. 갓난쟁이 여동생은 외할머니께 맡기고 그나마 데리고 다닐 만했던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로 향했다. 목적지는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도착하면 대개 아버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당시 계장쯤 됐던 아버지는 마음대로 퇴근할 수 있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나 보다. 어머니와 나는 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몇 시간이고 약속 장소 주변을 맴돌았다.

내가 시내 외출을 좋아했던 것은 외식을 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남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한남대교를 건너 남산1호터널을 지나 명동 부근으로 빠졌을 것이다. 터널을 지날 때면 늘 흥분됐다. 주황색 나트륨 조명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것을 정신없이 바라봤다. 터널의 입구와 출구 부근에는 조명의 간격이 멀다가 중간 부분에서는 간격이 좁아지는 것도 눈여겨봤다. 당시 텔레비전에서는 ‘그레이트 마징가’라는 만화가 인기리에 방영 중이었다. 주인공은 ‘브레인 콘돌’이라는 비행체를 타고 빠른 속도로 터널을 통과한 후 로봇의 머리 부분에 결합해 조종하는 방식이었다. 남산1호터널을 지날 때면 내가 마치 ‘그레이트 마징가’의 조종사가 됐다는 상상에 빠져들기도 했다.

유년기에 내가 위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현재의 강남3구에 해당하는 지역은 1963년에 서울특별시에 편입됐다. 이 지역은 ‘영등포의 동쪽’을 줄여 ‘영동(永東)’이라고 불리다가 1970년부터 대대적인 개발사업이 이뤄져 허허벌판에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남 개발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서울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필요했다. 즉 낮에는 도심에서 일을 하고 저녁에는 외곽의 주거 지역으로 퇴근하는 것이었다. 1966년 서울시장에 취임한 ‘불도저’ 김현옥(1926~1997)은 서울 외곽에서 도심을 오가는 차량의 흐름을 최우선시했다. 그는 임기 동안 자동차 전용의 고가도로를 건설해 차량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고 중심과 외곽을 잇는 여러 터널을 개설했다. 이와 같은 도시 인프라는 젊은 직장인들이 버스라는 대중교통으로 ‘영동’에서 출퇴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줬다. 그 결과 나의 부모님을 포함한 많은 젊은 부부들이 이 지역에 자리 잡게 됐던 것이었다.

1978년 3월29일 남산3호터널 용산동 진출입구 일대의 모습. /사진출처=<가자! 강남으로: 1974-1978(1)>1978년 3월29일 남산3호터널 용산동 진출입구 일대의 모습. /사진출처=<가자! 강남으로: 1974-1978(1)>


남산1호터널도 이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터널은 김 시장 임기 중인 1969년 3월에 착공해 그가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 직후인 1970년 8월에 개통했다. 처음에는 왕복 2차로로 운영되다가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 끝에 1995년 이후 왕복 4차로로 확장됐다. 터널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도심지까지 돌아가던 거리가 단축돼 자동차 연료를 절약하고 이동 시간을 줄이는 데 있었다. 남산2호터널도 비슷한 시기에 계획됐다. 1호터널이 남산을 대략 남북으로 관통한다면 2호터널은 용산구 용산동과 중구 장충동을 잇도록 설계됐다. 두 개의 터널은 남산 정상 부근에서 교차하게 된다. 이 지점의 지하 160m 지점에는 7,000평 규모의 입체 로터리가 마련돼 유사시 시민 40만명이 수용될 수 있는 대피소를 마련한다는 계획이라는 1969년 3월13일자의 한 조간신문 보도에서 이 무렵 남북관계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인류사에서 터널은 긴 역사를 갖고 있다. 무려 3,000여년 전에 파놓은 땅굴이 발견될 정도다. 고대와 중세 유럽에서 만든 터널은 민물을 장거리에 걸쳐 이동시키기 위한 수로(水路)이거나 군사 목적으로 만들어진 비밀 지하 통로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철도가 보편화되면서 승객과 화물을 운송하기 위한 터널이 부각되기 시작됐다. 증기기관 덕분에 엄청난 동력을 운송에 활용할 수 있게 되자 지형에 맞춰 이동하기보다는 운송 수단이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지형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냈다. 볼프강 시벨부슈는 ‘철도 여행의 역사’에서 19세기 엔지니어들은 “철로를 자로 그린 것처럼 직선으로 건설”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소멸”시킬 수 있었다고 썼다. 높은 지형은 깎고, 낮은 지형은 메우며, 그럴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악 지대에는 터널을 뚫기 시작했다. 근대의 시작은 인공적인 것들이 자연을 압도하는 형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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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한국 역시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전 국토에 수많은 터널을 건설해나갔다. 산악 지대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2018년 현재 전국에는 총 2,566개의 터널이 총연장 1,897㎞에 걸쳐 있다. 가장 많은 터널을 보유한 광역지자체는 경기도로 491개소에 총연장이 325㎞다. 2014년에 개봉한 영화 ‘터널’의 배경이 서울과 가상의 위성도시 ‘하도’를 잇는 하도터널로 설정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경기도에 이어 강원도·경상북도·전라남도 등 산악 지형이 많은 지역에 주로 터널들이 건설돼 있다. 자동차가 지나는 터널로 가장 긴 것은 11㎞에 가까운 인제~양양터널로 2009년에 착공해 2017년에 완공됐다. 수많은 터널로 우리는 구불구불한 지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직통하는 경로를 택할 수 있게 됐다. 인제터널이 개통되기 전 설악산에 가기 위해 몇 시간씩 걸리는 구불구불한 왕복 2차로에서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낙석을 걱정했던 일은 과거의 추억이 됐다.

터널은 힘들게 오르락내리락하거나 돌아서 가야 할 길을 직선으로 관통하게 해준다. 하지만 터널은 19세기의 철도와 20세기 이후에는 자동차와 친연성(親緣性)을 갖는 테크놀로지다. 몇 년 전 지방 출장을 마치고 새벽1시께 용산역에 도착했는데 도무지 택시를 잡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집까지 걸어갔던 적이 있다. 한강대교를 건널 때까지는 무난한 여정이었다. 시원한 초가을 바람을 맞으며 열심히 걸었다. 난관은 한강대교 남단의 상도터널이었다. 왕복 4차로의 이 터널에는 보행자를 자동차 매연에서 보호하기 위해 플라스틱 보호판을 설치해놓았다. 하지만 보행로는 두 사람이 동시에 걷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좁았다. 568m에 불과한 이 터널을 걸어서 통과하면서 불쾌감과 불안감에 시달렸다. 결국 출구까지 200m가량 남았을 때부터는 빠른 속도로 뛰어서 빠져나갔다. 그 이후 다시는 걸어서 터널을 지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이렇듯 하나의 테크놀로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테크놀로지들과 공존하며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1960년대 이후 서울에 설치된 고가도로·지하보도·육교·터널 등 도시 교통 인프라는 모두 자동차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통행량이 많은 네거리에서도 지하보도와 육교보다는 횡단보도를 활용하고, 고가도로는 철거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이행하고 있다. 보행자에게 보다 친절한 도시 설계 방식이다. 터널도 이러한 경향에 따라 없어질 수 있을까? 아니면 터널은 없애기에는 그 효용이 너무 큰 인프라일까? 이 질문은 미래 운송체계에 대한 과감한 상상력과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와 결부돼 있다. /최형섭 서울과기대 교수, 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민병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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