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지난달 약속한 비핵화 실무협상에는 나오지 않으면서 ‘북한판 이스칸데르’로 불리는 KN-23 단거리 탄도미사일, 대구경 조종방사포, ‘북한판 에이테킴스’인 전술 지대미사일, 그리고 초대형 방사포까지 각종 신형 무기들을 마구 쏘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위반인 북한의 도발에 대해 우리 동맹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모든 나라가 하는 일”’이라며 개의치 않는 태도를 보이면서 사실상 북한에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북한 외무성의 일개 국장이 미국 대통령도 묵인했는데 왜 시비를 거느냐고 우리에게 면박을 주기에 이르렀겠나.
북한은 자신들의 오래된 수법인 ‘통미봉남’ 전술도 다시 들고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아름다운’ 친서를 보내 사과인지 변명인지를 열심히 늘어놓으면서 우리한테는 비난과 모독을 쏟아낸다. 급기야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는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 앉을 생각도 없다”고 선언해버렸다. 이 와중에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연합훈련이 “터무니없고 돈만 든다”며 자신도 그런 훈련에 돈 쓰는 게 싫다고 김정은 위원장에게 동조했다.
북한의 한국 따돌리기와 이에 대한 미국의 무대응이 계속되는 경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수립 과정에서 한국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 미국이 자국을 직접 겨냥하지 않는 북한의 도발은 묵인하는 이른바 ‘한국과 미국의 안보이익 분리(decoupling)’가 현실화될 경우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의 대한 방위공약을 신뢰할 수 없게 되며, 이는 북한 비핵화 목표 상실과 함께 한국 내 핵무장론을 재점화하게 될 것이다.
올해 초 1조389억원으로 간신히 1년짜리 합의로 봉합된 방위비 분담금 문제는 아직 다음 협상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미국이 50억달러(약 6조원)을 요구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 측 요구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간 우리 정부가 미군 봉급을 제외한 주둔비용(Non Personnel Stationing Cost)의 50% 정도를 부담해왔다고 볼 때 기존 협상틀을 뛰어넘는 셈법인 듯 보인다. 서로의 입장차가 이렇게 큰 협상이 과연 원만하게 타결될지 의문스럽다. 만에 하나 협상이 결렬돼 협정 부재 상태가 발생하면 더 이상 미국의 전략자산을 전개할 수 없게 된다거나 주한 미군 숫자를 부득이 감축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고, 이에 대해 해외주둔 미군을 모두 불러들여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트럼프 대통령이 어떻게 나올지 그다지 예측이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미국·러시아 중거리핵전력(INF) 조약 폐기 이후 미국이 중국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 지역에 중거리미사일 배치를 희망하며 후보지로서 한국과 일본이 거론되는 것도 향후 한미동맹의 중대 현안으로 제기될 소지가 크다. 미국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중국과 북한은 벌써부터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있다. 앞으로 미중 간 전략경쟁이 지금의 무역·기술 패권 싸움에서 군사적 대립으로 확대되고, 그때 가서 미국이 우리에게 동맹이냐 중국이냐를 선택하라고 나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최악의 상태인 한국과 일본의 관계로 한미일 안보협력은 사실상 와해상태다. 우리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폐기 결정으로 3국 협력의 틀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미국은 6월 발표한 ‘인도태평양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이 경제·군사적 영향력 확대를 통해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데 대해 역내국가들과 긴밀히 연계해 대응할 것이라고 하며 한미일 3국 협력을 중요한 틀의 하나로 제시했다. 우리가 남북관계에 매몰돼 우리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동맹·우방들과 협력해 대처하는 노력을 등한시하면 어느새 우리는 그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나 있을지 모른다. ‘신(新) 애치슨라인’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한미동맹에 빨간 불이 켜졌다. 언제나 풍족해서 소중함을 모르는 공기처럼 어느 순간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부족해지면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하루빨리 정부와 국민이 자각하고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손을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