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이 우리나라를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우리 핵심산업의 소재·부품 수급에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반도체 등 주요 수출품목에 꼭 필요한 소재와 부품을 일본이 틀어쥐고 있어 불안감이 더 크다. 한일관계가 개선돼 문제가 풀리더라도 한 번 일어났던 일은 반복되기 마련이므로 근본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물론 우리도 일본에 대응조치를 취할 수 있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다. 일본과의 무역에 관한 한 우리는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탓이다. 일본과의 무역 불균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가 일본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은 1965년 이후 한 번도 무역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었다. 소재·부품 관련 대일 무역적자는 2010년 243억달러로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고 있으나 여전히 전체 대일적자의 63%나 된다.
제품을 열심히 만들고 수출해 외형은 그럴 듯하지만 실속은 일본이 차리는 구조를, 일본의 한 경제평론가가 가마우지를 이용한 물고기잡이에 비유했을 정도다. 한국 경제는 가마우지처럼 일본이라는 목줄에 묶여 수출을 해도 이익을 얻지 못하고 일본에 바치는 구조라는 것이다. 여기서 목줄은 바로 일본 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 산업이다. 정부는 몇년 내로 관련 산업의 대일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한 해 수조원씩을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에야말로 잘 되기를 바랄 뿐이다.
산업에 사용되는 소재와 부품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소재 대부분은 지금이라도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만들 수 있지만, 문제는 산업에 사용할 정도의 품질과 양을 맞추는 일이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경험에 기반한 노하우의 축적이 필요하다. 따라서 소재·부품 산업에 대한 지원은 최종 제품보다는 기술 확보와 축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또 최종 제품을 만드는 기업과 소재·부품을 공급하는 기업 간 끈끈한 유대관계, 즉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이 생태계 안에서 기술 축적이 일어나야 한다. 한 가지 소재는 지원하면 금방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수많은 소재 개발을 모두 일일이 지원할 수는 없다.
탄소섬유의 경우, 상품으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섬유의 표면처리 또한 섬유 못지않게 중요하다. 탄소섬유 세계 1위인 일본 도레이는 대략 60가지 정도의 섬유 표면처리기술을 확보하고 고객의 수요에 대응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 도레이가 직접 개발한 기술은 5가지고 나머지는 모두 중소 협력회사들에서 공급받는다. 이 협력사들은 도레이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수대에 걸쳐 유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형성된 생태계가 바로 일본 소재·부품 산업의 힘이다.
우리가 진정한 산업 선진국이 되려면 이러한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숲을 조성하듯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IT 관련 기술이 각광받으면서 한동안 소재·부품 기술에 대한 지원은 뒷전으로 밀려난 느낌이 있었다. 특히 대기업이 수혜자이므로 이 부문은 민간에 맡겨야 한다는 논리도 있었다. 하지만 중간진입 전략으로 우리가 등한시했던 산업의 기초 분야가 발목을 잡고 있는 지금 더는 방관할 수 없다.
정권을 뛰어넘는 일관되고 장기적인 지원계획이 마련돼야 한다. 일시적 연구개발비 지원만으로는 어렵다. 기술은 물론 각종 규제 등 우리의 환경과 약점을 면밀히 분석해 20~30년간 장기 계획으로 지원해야 한다. 취약한 소재·부품 산업 생태계를 건실하게 만들려면 왕도가 따로 없다. 긴 안목으로 꾸준히 기술을 축적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길뿐이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한다면 우리 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
<편집자 주> 이우일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차기 회장이 백상논단 새 필진으로 합류합니다. 그는 서울대 기계공학 학·석사, 미국 미시간대 박사로 지난 8월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를 정년퇴임했으며 현재 ‘이달의 과학기술인상’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