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노동시장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일하는 형태는 물론 전통적 노동의 개념마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과거 ‘낫과 망치’로 상징되는 육체노동 대신 단순 반복 업무는 로봇에 맡기고 인간은 기계를 효율적으로 조작·명령하는 노동으로 진화하고 있다. 창의적 노동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일하는 방식 역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형태로 뒤바뀌고 있다. 플랫폼 노동(온라인에서 일자리를 구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로봇은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오는 2030년이면 저숙련 노동자의 44%가 자동화의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할 것으로 예측했다.
주요국이 노동4.0시대 도래에 발맞춰 분주한데 한국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있다. 행정부는 노동 규제를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정치권은 기득권 강성 노조의 눈치 보기에 급급해 요지부동이다. 정규직·비정규직 논란은 노동시장 변화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시대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노동 제도 전반을 손질해야 할 때인데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미래 노동시장 변화의 파장을 얕잡아보는 것이다. 수출·제조업 중심으로 우리나라와 산업 구조가 유사한 독일은 노동·교육·법무·복지 등 주요 정부 부처가 달라붙어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구현 연세대 명예교수는 “현재 우리나라 노동 정책은 기술변화로 인한 노동시장의 변화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면서 “노동시장 경직화가 기업의 기술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했다.
4차산업發 패러다임 바뀌는데
정부·정치권은 기득권 勞 눈치
근로 유연성보다 ‘옥죄기’ 급급
고질병 된 이중구조가 변화 장벽
“노조 하루빨리 인식 전환 필요”
덜컥 도입한 주 52시간 근로제가 대표적이다. 근무의 유연성 확보가 핵심인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오히려 유연성을 옥죄고 있다. 보완책으로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을 3개월에서 6개월로 늘리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있지만 언제 처리될지 기약이 없다. 당장 내년 1월부터는 50~299인 사업장까지 주 52시간 근로제가 확대 도입되지만 이를 처리해야 할 국회는 꽉 막혀 있다. 사실상 올해 말까지 처리해야 내년부터 소규모 사업장이 입을 피해를 그나마 줄일 수 있지만 정쟁이 해소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 결정 구조를 이원화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도 국회에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획일적인 최저임금 인상률 결정에서 탈피해 업종별·규모별 차등화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연내 국회 통과가 돼야 오는 2021년 최저임금을 새로운 체제에서 정할 수 있다. 산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는 이미 자신들 손을 떠났다며 뒤에 숨고 이를 처리해야 할 국회는 막혀 있다”면서 “피해를 입는 것은 기업뿐”이라고 토로했다. 플랫폼 노동자 증가에 맞춰 고용보험 가입 대상을 특수고용 노동자 등으로 넓히는 내용의 고용보험법 개정안도 지난해 11월 발의된 후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무엇보다 기득권화한 노조에 4차 산업혁명이 몰고 올 자동화·디지털화 물결은 다른 세상 얘기다. 독일 등 주요 선진국 노조가 발 벗고 나서서 노동4.0시대를 주도하고 있지만 한국 노조에 4차 산업혁명 시대 대응은 뒷전이다. 국내 최대 노조인 민주노총은 조직 내에 7개 특별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미래 노동시장에 대비하는 특위는 없다.
‘정규직은 선(善), 비정규직은 악(惡)’이라는 뿌리 깊은 확신은 고질병이 된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해소를 가로막고 있다. 이 와중에 현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0)’라는 정치적 구호를 들고 나와 노조의 선명성 경쟁을 부추기고 있다. 양대 노총이 비정규직 문제를 놓고 세력 대결을 하는 양상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펼쳐지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는 “우리나라 노조의 인식은 노동자가 생산라인에 서서 나사를 조이던 시대에 머물러 있다”면서 “노동과 자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본이 노동을 수탈한다는 식의 이분법적 개념에서 노조가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했다./세종=한재영기자 jyha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