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청론직설]"제조업 붕괴 초입단계...중견기업 위주로 산업정책 틀 확 바꿔야"

<이홍 한국중견기업학회장>

日 중견기업 매출비중 30% 달하는데 韓은 13% 그쳐

대·중기 이분법적 사고에 정책적 홀대...실력 못키워

한일 무역전쟁 통해 허약한 국내 산업실태 민낯 드러나

기술·연구개발기반 갖춘 중견사 육성해야 克日도 가능





이홍 한국중견기업학회장은 “일본의 경제보복을 뛰어넘으려면 우리의 취약고리인 중견기업이 일본 수준으로 성장해야 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일본의 기술예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극일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권욱기자이홍 한국중견기업학회장은 “일본의 경제보복을 뛰어넘으려면 우리의 취약고리인 중견기업이 일본 수준으로 성장해야 한다”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일본의 기술예속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극일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권욱기자


최근의 한일 경제전쟁을 보면서 일본 중견기업들의 저력에 새삼 놀랐다는 이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산업의 목줄을 죄는 곳이 대부분 탄탄한 기술력과 오랜 역사를 갖춘 중견기업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타깃으로 삼은 포토레지스트나 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필수소재 3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홍 한국중견기업학회장(광운대 경영대 교수)은 “한일 무역전쟁을 통해 일본에 비해 허약한 우리 산업의 민낯이 드러났다”며 “하루빨리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학회장은 특히 “국내 제조업은 사실상 붕괴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다”며 “중견기업 위주로 산업정책의 틀을 개편하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이 학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19일 서울 노원구 월계동에 있는 광운대 연구실에서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일본이 한국과 벌이는 무역전쟁의 최전선에 중견기업을 앞세웠다는 얘기가 많다. 일본에서 중견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이 그렇게 막강한가.

△이번에 총대를 멘 일본 화학업체를 살펴보면 중견기업들의 역할을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이 세계 시장의 92%를 점유하고 있는 포토레지스트를 생산하는 도쿄오우카공업이 대표주자다. 이 회사는 1940년에 창업해 매출액이 648억엔에 달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에 직격탄을 날린 불화수소 분야에도 모리타화학공업 같은 중견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이들의 경쟁력은 바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는 기술에서 나온다. 도쿄오우카공업은 세계 각지에 생산공장을 운영하면서 매출의 70%를 해외 시장에서 올리고 있다. 일본의 경우 종업원 수 250~500인의 기업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49%에 달한다. 반면 우리는 13.5% 수준에 머물러 큰 격차를 드러내고 있다. 일본 경제가 취약한 가운데서도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할 수 있는 핵심적 이유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중견기업들이 굳건히 버티고 있어서다.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중견기업이 일본에 비해 튼튼하지 않다는 얘기인가.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 경제의 취약점을 면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우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에 비해 결정적으로 낙후된 기업군이 있는데 바로 중견기업이다. 삼성이나 LG 같은 대기업들은 이미 소니와 파나소닉을 누르고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고 봐야 한다. 일본 대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사이 한국 대기업의 경쟁력이 꾸준히 높아진 덕택이다. 벤처기업을 포함한 중소기업 역시 경영환경을 따져보면 일본에 비해 오히려 대등하거나 앞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중견기업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끼여 정책적으로 홀대를 받다 보니 제대로 실력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불행하게도 중견기업이 가장 취약한 기업군으로 남아 있다.

-우리 중견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뒤처지고 경쟁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가장 큰 이유는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 각종 혜택이 사라지고 제약이 생긴다는 점이다. 정부 정책이 오히려 중견기업의 성장을 억압하는 게 현실이다. 기업들이 성장을 거부하는 ‘피터팬증후군’은 심각한 수준이다. 피터팬증후군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지 않으려 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이미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기업들의 의욕 상실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만 해도 그렇다. 공정위가 대기업을 규제한다고 하지만 실제 피해를 보는 곳은 중견기업들이다.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를 규제한다면서 실제로는 마땅한 부품 공급처를 구하지 못해 불가피하게 관계사를 만든 중견기업을 타깃으로 삼는다. 이런 일이야말로 국가적 낭비 아닌가. 현장에서는 중견기업을 대기업으로 취급한다며 숨도 제대로 못 쉬겠다고 호소하고 있다.

-정부가 중견기업 성장에 관심이 적은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부가 중소기업과 대기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률적인 측면에서 중소기업법과 대기업법으로 나뉘어 있다 보니 중견기업은 대부분 대기업에 속하게 됐다. 게다가 우리는 내수시장을 기준으로 구분하다 보니 어느새 중견기업도 대기업으로 인식돼버렸다. 예전의 중소기업청은 중견기업에 아예 손을 놓아버렸고 산업통상자원부는 지원을 끊어버리니 위상이 애매해졌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고용은 중소기업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대기업에는 높은 부가가치를 의존하는 등 양극으로 치닫는 경제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대만의 기업정책은 참고할 만하다. 대만은 중소기업이 탄탄하지만 정책적으로 키운 적이 없다. 오히려 가혹할 정도로 자립심을 키우는 데 주력하고 있다. 대신 중견기업을 키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이 덕택에 대만은 전체 기업 중 중견기업의 비율이 한국의 1.5배에 달할 정도로 중견기업 강국으로 올라섰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부품·소재 산업의 국산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예산도 집중적으로 쏟아붓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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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 산업정책 변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사실 한국에는 내세울 만한 산업정책이 존재하지 않지만 이번 무역규제로 소재·부품 산업의 취약점과 리스크가 그대로 드러났다. 또 기술독립을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우리의 산업정책을 새롭게 만드는 기회가 제공된 것도 성과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우리가 일본에 비해 뒤처진 기업군을 확실히 점검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간판 대기업들은 우리가 일본보다 앞서나가고 중소기업도 기업가정신이나 신사업 진출 의욕 측면에서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일본에 뒤지고 있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결국 충분한 납품능력과 연구개발(R&D) 기반을 갖춘 중견기업을 키워야 국산화도 가능하고 단기간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 산업정책이 시대 변화를 뒤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부처 간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더 어려워진 측면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예전에는 그나마 산업정책이 제대로 가동됐다. 이를 통해 후진적인 산업을 선진 산업으로 탈바꿈하고 경공업을 중공업화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산업정책이 아예 사라져버렸다. 현재 산업 부문을 맡은 곳은 산업통상자원부와 중소벤처기업부다. 하지만 중기부는 산업정책을 제대로 기획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없다. 여전히 실행부처로서 자금을 쓰던 과거 중소기업청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산업부는 사실상 대기업 전담 부처로 봐야 한다. 문제는 대기업들이 글로벌 수준으로 커지면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반기업정서까지 높아지다 보니 오히려 기업을 옥죄는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산업정책의 틀을 중견기업 위주로 바꿔야 한다. 산업부도 중견기업을 키우는 역할로 위상을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

-중견기업의 경우 조세 지원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다고 들었다.

△중견기업은 일정 규모에 이르면 갑자기 무거운 세금부담이 생긴다. 기업 쪼개기 같은 행태가 벌어지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R&D 지원만 따져봐도 정책의 허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R&D 개발을 위한 설비투자세액공제의 경우 중소기업은 6%지만 중견기업은 절반 수준인 3%에 머물고 있다. 선진국들은 R&D에 대해서는 외국 기업이라도 100% 비용으로 인정해주고 있다. 연구인력이 우수 인재 개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비용처리를 해주는 게 원칙이다. R&D는 국가의 인적자원이 육성되는 가장 중요한 채널인데 왜 정부가 막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일본도 가업승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은 어떻게 이런 난관을 극복하고 있나.

△일본의 인구 감소는 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일본의 중소기업은 약 381만개에 이르는데 이 중 127만개는 경영자들의 나이가 70세를 넘었지만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중소기업의 3분의1 이상이 후계자가 없어 폐업할 경우 오는 2025년에는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22조엔 정도 줄어들고 일자리도 650만개나 사라질 것으로 예측됐다. 일본 정부는 이에 따른 사회적 파장을 우려해 상속·증여세를 대폭 감면해주는 등 극단적 정책을 동원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소기업 사업승계 5개년 계획’을 통해 상속세와 증여세를 없애는 조치를 취했으며 직원도 기업 규모와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제도를 완화했다.

-한일 경제전쟁이 장기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런 현실적 여건에서 극일의 방향은 무엇인가.

△극일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봐야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상당 수준 극일에 다가서고 있다. 물론 아직도 한국은 1인당 GDP 기준으로는 일본에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구매력(PPP)으로 따져보면 거의 대등한 수준에 올라왔다. 이런 가운데 진정한 극일은 경제적으로 일본을 압도할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이 노력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핵심은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일본 기업을 압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이는 대기업·중견기업과 중소기업 모두가 힘을 모아야 가능하다. 정부는 일본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중견기업을 어떻게 육성할지에 대한 방안을 찾는 것이 필요하고 이것이 극일의 매우 중요한 통로임을 깨달아야 한다. 전쟁은 단순히 강렬한 애국심이나 분노적 감정만으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상대에 대한 적확한 인식과 이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상범논설위원 ssang@sedaily.com

He is…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KAIST에서 경영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미시간대 교환교수를 지냈으며 조직 혁신과 창의성 개발에 남다른 관심을 쏟고 있다. 공공기관혁신평가 총괄위원장, 정부혁신관리위원장, 개방직 공무원 선발위원 등을 맡았으며 국내 대기업들의 경영혁신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지식경영학회장, 한국경영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학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기업을 위한 지식경영’ ‘초월적 가치경영’ ‘지식점프’ ‘국가경쟁력, 중견기업에서 답을 찾다’ 등이 있다.

정상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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