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들, 그중에서도 아이들이 동물을 보며 기뻐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동물원을 돌아다니면 야생동물들이 먼저 다가와 기억해주고 아는 척을 해주는데 소소한 즐거움에 스트레스가 다 풀려요.”
최근 용인 에버랜드에서 인터뷰를 한 정동희(49·사진) 에버랜드 동물원장은 신이 나서 동물 이야기를 풀어냈고 눈빛은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그는 지난 1995년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에 입사해 지난해 12월 에버랜드 동물원장으로 취임했다. 24년의 긴 세월에 질릴 법도 하지만 그는 지금도 동물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고 한다.
“타이거밸리에 가면 호랑이가 ‘취취’ 소리를 내며 냄새를 맡거나 아는 척을 하고 가끔 재롱도 피웁니다. 인공포육을 한 호랑이는 공격적이지 않거든요. 몽키밸리에 사는 침팬지 갑순이는 멀리서 이름을 부르면 부지런히 달려와 머리를 흔들며 인사를 해줍니다.”
그는 “동물원에서는 항상 동물의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며 “뱀과 새처럼 동물들은 생김새와 살아가는 방식이 천차만별이라 매번 버라이어티한(다양한) 매력을 발견하다 보면 질릴 틈이 없다”고 웃었다.
그중에서도 동물들의 가장 큰 매력은 ‘순수함’이라고 한다. 정 원장은 “동물들은 사람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마지막까지 서로 계산하지 않고 아이처럼 순수하다”며 “너무 아픈 동물은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안락사를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마지막까지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나도 동물처럼 그렇게 정직하고 충직하게 살고 직원들에게도 믿음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오히려 동물에게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동물 가운데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한국 호랑이에게 가장 마음이 간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동물은 북극곰 ‘통키’다. 고령인 통키의 마지막을 위해 영국 야생공원을 새 보금자리로 준비해놓았는데 이동 한 달 전인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는 “좋은 곳에서 행복하게 이 세상을 마감하기를 바랐는데 못내 아쉽다”고 토로했다.
정 원장이 가장 좋아하는 TV 프로그램도 ‘동물의 왕국’과 같은 동물 다큐멘터리다. 야생동물들의 서식지를 직접 갈 수는 없어도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아이들(동물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마음을 되새긴다는 것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 마당에서 키운 잡종견 ‘임마’가 좋았고 주말이면 친척 집에 내려가 동물들을 관찰하는 것이 즐거웠다고 한다. 대학도 1989년 서울대 수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졸업 즈음 동물복지, 생태계 보전 등 거창한 명분보다는 야생동물을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진로를 동물원 입사로 정했다.
하지만 막상 동물원에 들어가자 환상이 깨졌다. 동물이라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고 아플 때가 많다 보니 항상 긴장하며 살았다. 상당한 인내심과 사명감이 필요했다. 그러다 입사 석달 만에 삼성안내견학교로 발령이 났고 인공수정으로 번식을 돕는 일을 맡았다. 정 원장은 “힘든 동물원 실습을 거치면서 안내견 사업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며 “견공의 건강이나 질병 관리 등을 깊게 배우다 보면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더라도 동물병원 운영에 도움이 되겠다는 사심도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정 원장은 “수정 과정부터 참여한 강아지를 직접 손으로 받았던 일은 잊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었다”고 회상하며 “안내견이나 구조견이 되지 못한 친구들도 좋은 가정에 입양될 수 있도록 돕다 보니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안내견이 시각장애인과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하는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노령이 돼 안내견 학교로 다시 돌아와 세상을 떠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이런 경험 탓에 정 원장은 2016년 에버랜드 동물원 동물기획그룹장으로 복귀하자마자 안내견의 일생을 책임진 것처럼 세계 수준의 동물 복지를 제공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정 원장에게 동물원의 동물은 사람과 친교를 맺으러 자연에서 온 ‘대사’ 같은 존재이다. 그는 “야생동물은 관람객들이 도시 밖 환경에도 눈을 돌릴 수 있도록 돕는다”며 “동물 본연의 아름답고도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야생동물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 원장이 취임 후 동물 복지를 위해 관람객 눈에 보이지 않아 ‘백사이드’라고 불리는 동물사에 눈을 돌렸다. 잠을 자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는 설비도 중요하지만 동물이 야생의 습관을 자연스럽게 유지할 수 있어야 행복감이 높아진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야생동물들은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천적을 만나는 경험을 하며 하루 에너지를 소비하는 시간분배(time budget) 행동 패턴을 보인다”며 “충분하지는 않지만 동물원 안에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있다”고 말했다. 가령 동물사 안에는 줄을 설치하고 맹수 사파리 뒤편에도 나무 쉼터를 배치했다. 정 원장은 “청소 과정이 더 번거로웠지만 동물이 그곳에서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 원장에게 멸종위기종의 보존은 동물원의 존재 목적 가운데 하나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해 ‘타이거밸리’를 개관하며 한국범보전기금과 함께 ‘두만강 한국 호랑이 생태통로 프로젝트’ 지원을 추진했다. 두만강 지역의 한국 호랑이가 산업개발 등으로 멸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더불어 생태 설명회를 기획해 한국 호랑이가 처한 현실과 보존 노력 등을 알리는 창구를 마련했다.
정 원장은 “북한·러시아·중국 접경 지역에는 아직 호랑이가 살아 있지만 산업화 진행 등으로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며 “동물원에서 호랑이의 공간을 두 배 이상 넓히고 자작나무 등으로 서식지를 재현한 뒤 사육사들이 생태교육을 진행하는데 관람객의 호응이 매우 좋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서식지 보존과 더불어 야생동물을 동물원에서 보호하는 것도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팜유 생산을 위해 열대 우림이 파괴되면서 지난 10여년 동안 오랑우탄 개체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며 “동물원 차원의 번식 노력도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돌아온 후 에버랜드는 멸종위기 동물의 번식에 29두나 성공했다. 황금머리사자타마린과 황금원숭이가 새끼를 봤고 유럽홍학 등이 알을 낳았다. 그는 “동물원이 가진 해외 네트워크와 인공수정 기술로 종 보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며 “최근에는 자이언트판다·코뿔소 등의 번식을 시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수의사로서 일반적인 동물 생태, 관리 업무의 전문가지만 직접 사육한 경험은 적은 편이다. 이 때문에 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사육사나 수의방역·안전환경·서비스 등 많은 부분에서의 협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원장은 “제 역량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 전문가들과 소통하고 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은퇴 후 어떤 일을 할지 물었다. 그는 “직접적인 치료에 손을 놓은 지 조금 오래돼 생각하면 두렵다”면서도 “아마도 동물의원을 할 것 같은데 단순치료를 넘어 안내견학교·동물원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반려동물과 교감해 야생동물과 공존하는 방법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오승현기자
He is
△1971년 서울 △1989년 서울 오산고 △1993년 서울대 수의학과 △1995년 용인자연농원 동물원 입사 △1996년 삼성안내견학교 파트장 △2002년 서울대 수의학 석사 △2016년 에버랜드 동물원 동물기획그룹장 △2018년 12월 에버랜드 동물원장
정동희 에버랜드 동물원장 "동물·사육사·관람객 모두가 행복한 동물원이 꿈" |
동물복지 선진수준으로 끌어올리려
심사만 1년 걸리는 AZA평가인증 받아
온갖 연구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
최근 찾은 경기도 용인의 에버랜드 주토피아. 코끼리는 흙바닥 위 4m 높이에 매달린 건초더미에 코를 비비고 있었고 기린은 나무에 매달린 원통 모양의 구멍 뚫린 통 사이로 혀를 집어넣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중 건초 지급기는 코끼리가 코 근육을 사용하게 해 얼굴 근육이 굳는 것을 방지해주고 벌집 모양의 통은 침 분비를 늘려 기린의 소화를 돕는다.
모든 동물원이 다 이런 것은 아니다. 4평짜리 컨테이너 안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자 이야기나 작은 새장 안에 갇혀 관람객들의 손이 무분별하게 닿는 페럿 등 안타까운 사례도 많다. 에버랜드는 지난 9월 미국동물원수족관협회에서 평가하는 AZA 인증을 받았다. 동물복지, 보전·연구, 생태교육, 재정상태 등을 복합적으로 보는데 검사 기간만 1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요건이 까다롭다. 북미에 있는 2,800여 동물원 중 인증을 받은 곳은 10%가 되지 않는다. 동물원의 이 같은 변화 뒤에는 정동희(49·사진) 에버랜드 동물원장이 있었다.
정 원장은 AZA 인증을 신청하게 된 이유에 대해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아직 우리나라에는 해외 수준의 동물 복지를 요구하는 기준이 없어 AZA를 신청하게 됐다”며 “단순히 동물 관리를 넘어 동물 교육, 야생동물 보전 노력, 동물에 대한 연구, 직원 역량, 안전과 보안 등 다양한 기준을 만족해야 하기에 동물원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6년 12월 AZA 인증 신청을 한 뒤 1년이 지난 2017년 미국수족관협회에서 멘토 두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는 동물과 동물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리를 강조했다고 한다. 정 원장은 “모든 동물이 항상 전시장에 나와 있지는 않다”며 “동물사에 머무는 동물들도 야생에서처럼 다양한 활동을 해야 하는데 이에 필요한 많은 조언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를 위해 동물사 안에도 줄과 쉼터·장난감 등을 설치하는 등 동물사 안에서도 풍부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정 원장은 요즘이 가장 바쁜 시기라고 한다. 그는 “AZA 인증 획득으로 멸종위기종 보전을 위한 활발한 국제교류와 협력이 가능해졌다”며 “바람직한 전시기법, 사육사의 훈련 역량, 과학적 연구 등을 나누느라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가 원하는 5년·10년 뒤 에버랜드 동물원의 비전은 무엇일까. 그는 “동물·사육사·관람객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동물원”이라고 못을 박았다. 정 원장은 “동물과 사람이 행복한 동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며 “맹수 사파리, 초식 사파리 등이 생태계에 가깝게 설계돼 있지만 동물에게 더 많은 공간을 제공할 때 관람객도 더 많이 찾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아가 5년마다 갱신되는 AZA 인증 유지를 넘어 동물원을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야생동물 보존교육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사진=오승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