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일이면 일본이 반도체 소재 등 3대 품목의 수출규제 조치를 시행한 지 100일이 된다. 정부는 ‘극일(克日)’을 외치며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지난 8월 확정한 추가경정예산안에 일본 수출규제 대응을 위한 예산 2,732억원을 반영했으나 실집행률은 74%에 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외교적 해법에 한계를 보이면서 여전히 기업들은 불확실성에 놓여 있다.
9일 서울경제가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일본 수출규제 대응 추경 실집행률 자료를 보면 9월 말 기준 실집행은 2,028억원(74%)에 머물렀다. 긴급하다고 추경안에 반영했어도 계약 등이 완료되지 않아 시중에 풀리지 않은 자금이 두 달이 지났어도 26%나 된다는 의미다. 중앙 정부는 출납 기준으로 집행률을 잡지만 실제 사업에 투입되는 실집행은 지방자치단체 등이 돈을 써야 이뤄진다. 정부는 해외의존도가 높은 부품·소재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개발(R&D)·실증·사업화·양산 지원 등 2,732억원의 추경을 편성했고 8월2일 국회에서 처리됐다.
대표적으로 대일의존 핵심품목 중심으로 기술개발 조기 추진을 위해 중소벤처기업부가 마련한 중소기업기술혁신개발(R&D) 사업은 10일까지 신청 접수를 받고 있어 217억원의 예산 중 집행액은 174억원이나 실집행은 단 2,500만원뿐이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한국과학기술원 부설 나노종합기술원 지원 R&D 사업도 실집행률이 0%였다. 과기정통부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시장에서 가격이 높고 희소성이 큰 장비여서 구매장비 섭외 및 가격협상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기계산업핵심기술개발 사업은 사업자 선정이 안 돼 320억원의 추경예산 중 7억원만 실집행됐다. 추 의원은 “시급성을 감안해 추경을 편성했는데 실집행률이 목표에 못 미친다”며 “예산집행 관리감독을 철저히 하면서 신속하게 집행해야 추경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부처 합동으로 수립한 소재·부품·장비 종합대책도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재탕이라는 비판 역시 제기된다. 실제 2000년부터 부품과 소재 산업 지원 정책은 계속 시행돼왔고 이번 종합대책도 그 연장선일 뿐 새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최근 10년간을 봐도 2011년 ‘소재부품산업 2020’, 2013년과 2016년 3·4차 소재부품발전 기본계획은 세제지원이나 품목지정, 지원방법 등 ‘디테일의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2일 산업부에 대한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이 같은 문제 제기가 터져 나왔다. 당시 곽대훈 한국당 의원은 “정책 지원이 계속됐음에도 핵심소재 기술력 확보는 미흡하다”며 “8월 소재·부품·장비 종합대책 발표하면서 ‘시급하게 확보하겠다’는 20개 기술의 경우 여태 실증분석에도 착수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꼬집었다.
이는 ‘낮은 R&D 효율성’이라는 한국의 고질병과 맞닿아 있다. 한국은 2016년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예산 비중(4.24%)과 정부 R&D 예산 비중(1.17%)이 각각 세계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기술무역수지는 같은 해 41억5,000만달러, 이듬해인 2017년에는 46억8,000만달러로 적자 폭을 외려 늘리고 있다. ‘극일’ 맞대응에 치중한 탓에 정부가 무리한 대책을 들고 나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소재·부품·장비 기술 국산화를 수출규제 대응의 핵심에 두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조언한다. 강인수 국제통상학회장(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은 “글로벌 분업 구조(밸류체인)를 고려할 때 정부가 강조하는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율, 자립도 극대화는 오히려 산업의 폐쇄성을 높이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며 “국산화를 내세우는 것 자체도 반일 감정의 연장선”이라고 지적했다. 발단은 정치와 외교 문제인데 엉뚱한 산업 정책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하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익명을 요구한 국책 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일본 수출규제의 핵심은 경제가 아니라 외교”라고 강조했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 역시 “일본 수입 대체가 수출규제 대응 정책의 핵심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세종=황정원·조양준·한재영기자 garde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