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여명]'위대한' 586들

최형욱 사회부장

시대변화에도 자기성찰 없는 586

젊은 세대 싫어하는 이유도 외면

더 퇴행적 보수 덕분 생명력 지속

국민 항로 안내할 리더십 안 보여

최형욱 사회부장최형욱 사회부장



30여년 전 고등학교에서 야간 강제학습을 할 때였다. 친구들 두엇과 도망쳐 영화를 보러 갔다가 가슴에 벼락을 맞고 말았다. 주연 여배우가 연인을 잃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청순하던지. 풋내기는 상사병을 앓았다. 나이 차를 따져보기도 하고 대학에 합격한 뒤 한번 만나보는 개꿈도 꿨다. 그러다 한 10년 전쯤 시시콜콜 신변잡기를 늘어놓는 TV프로그램에서 그를 우연히 봤다. 더 이상 ‘내 마음의 별’이 아니었다. 그게 어디 그 여배우 탓이랴. 영화 속 아우라를 현실로 착각했던 철부지 청춘의 잘못이지. 하지만 가슴 한편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요즘 청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 세대는 유난히도 ‘별’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던 듯싶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100여 년 전 헝가리 미학자인 게오르그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글귀다.

1980년대 학번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서사시와 근대 소설을 비교한 글의 전후 맥락은 저 멀리 던져버리고 이 낭만적이면서도 현학적인 문장에 매료됐다. 그들에게 현실은 삶과 이상이 괴리된 곳이었고 절망 그 자체였다. 분단과 독재, 천민자본주의라는 엄혹한 현실을 외면할 수도, 개인의 행복과 자아를 포기할 수도 없는 불행한 세대라고 울부짖었다. 청춘 특유의 나르시시즘과 자아도취, 자기기만과 자기혐오가 혼란스럽게 뒤엉키며 방황했고 해답을 주지 않는 전공 서적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들은 분노와 헌신, 희생을 무기로 민주화 운동에 몸을 던졌고 결국 사회 주류로 성장했다.


하지만 자기애나 이념적 확신이 지나쳤던 탓일까. 이상을 좇던 그들은 스스로 별, 즉 무오류의 절대선이 된 듯하다. ‘저들은 적폐, 폐기된 과거, 몰락하는 시대의 잔재이고 우리는 혁명, 미래, 어둠을 비추는 영원한 빛’이라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던 한 여성 작가의 글에서 586운동권 주류들의 내면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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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시대가 바뀌면서 구세대가 됐다는 비판에 불편해한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유럽 내 조직 노동자에 기반한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들이 퇴조하고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약진하는 현실에서 반면교사를 얻을 능력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앞에서 애완견처럼 알랑대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배알도 없어서 그러는지 안다. 또 대입전형에서 정시가 강남 ‘금수저’에 유리하다는 연구결과가 많은데도 왜 국민들은 정시를 선호하는지 곤혹스러울 뿐이다. 그들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해석이 ‘어떻게’ ‘왜’ 다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문학동네, 2009) 미국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대로 과거가 그립더라도 과거로 회귀할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면 좌표도 바뀌어야 한다. 미래가 아닌 시대착오적인 이상을 좇는 한 개비츠의 말로처럼 파국만이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586들은 생명을 연장할 것이다. 더 퇴행적인 자유한국당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 전 장관이 586 위선의 민낯을 드러냈다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은 산업화 시대의 종언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저 반문(反文)과 수구적인 진영 논리, 정치적 생존 본능만 남아 있는 듯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미래 성장동력 발굴이나 현 정부 정책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대안 제시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패스트트랙 수사 대상 의원에 대한 공천 가산점과 셀프 표창장 논란, ‘공관병 갑질’ 분노를 일으켰던 박찬주 전 육군 대장 영입 논란 등을 보노라면 한숨만 나온다. 이런 보수가 있는 한 586들은 위대하다. 그리고 조류는 바뀌고 폭풍우가 몰려오건만 항로를 밝혀줄 별빛도 잘 보이지 않는다. chohuk@sedaily.com

최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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