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가 구름까지 쌓아 올린 돌무더기
사방으로 흘러내렸다는 전설 깃들어
거북바위·머리바위 등 기암괴석도 즐비
강원 고성에는 억겁의 시간이 빚어낸 수많은 비경이 있다. 중생대와 백악기 말기를 거쳐 화강암이 풍화작용을 일으키며 완성된 설악산 울산바위, 빙하기의 해수면 변화로 바닷물이 갇혀 생긴 화진포 외에도 익히 알려진 곳이 수두룩하다. 그에 반해 ‘돌이 흐르는 강’을 품고 있는 운봉산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뜸한 자신만의 숨은 명소를 찾아 고성의 가을이 선사하는 마지막 정취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강원 고성 토성면에 위치한 해발 300m가 채 되지 않는 운봉산은 이곳에 사는 주민들도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등산로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기자에게 다가와 목적지를 묻는 주민에게 운봉산 가는 길을 찾는다고 답하자 “운봉산에도 등산로가 있나요?”라는 물음이 돌아왔다.
운봉산은 고성군이 지난 2012년 4개의 숲길을 정비하며 등산객들에게 알려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산을 찾는 이는 많지 않은 듯싶었다. 주변에 워낙 빼어난 경관이 많다 보니 이곳까지 발걸음이 미치지 않는 것일까. 기자가 산을 찾은 이날 등반을 마치기까지 단 한 사람도 산길에서 마주칠 수 없었다.
현무암으로 이뤄진 운봉산은 용천사와 학야리 군부대, 미륵암 등 어디에서 오르기 시작해도 1시간이면 충분히 등산을 마칠 수 있는 아담한 산이다. 넓은 평지 사이로 누군가 꼬집어 올린 듯 오뚝하게 솟은 모양이다. 지금은 찾는 이가 적지만 과거 고성에 등대가 세워지기 전에는 동해안을 다니는 배들이 이정표로 삼던 소중한 산이었다고 한다. 규모는 작지만 길은 제법 험하다. 산 중턱에는 거북바위·머리바위·주먹바위 등 재미난 기암괴석들도 적지 않게 품고 있다. 산길에는 군데군데 토사가 흘러내려 미끄러운 곳도 있다.
운봉산(雲峰山)은 구름을 이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해발고도 285m인 산이 이 이름을 얻게 된 배경으로 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오래전 금강산과 운봉산에는 힘이 센 두 장사가 각각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에 들고 싶었던 운봉산 장사는 전국 각지 동물들을 모아 부지런히 돌을 쌓았고 이내 산봉우리는 구름보다 높게 솟아올랐다. 금강산 장사는 운봉산의 산세를 시기하다 한가지 꾀를 냈다.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이미 다 지어졌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소문을 들은 운봉산 장사는 허탈함에 빠졌다. 그동안의 노고가 헛수고가 되었다는 생각에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땀 흘려 지은 봉우리를 석 달하고 열흘 동안 내리쳤다. 눈물은 골짜기를 이루고 돌무더기는 사방으로 흩어져 지금의 운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해발 300m 채 안되는 정상 올라서면
넓은 초원과 바다 한눈에 내려다보여
뒤편엔 설악산·금강산 둘러싸여 장관
20분 정도 산을 오르다 보니 운봉산 장사가 무너트렸다는 돌무더기, ‘돌이 흐르는 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경사에도 육각 기둥이 서로 차곡차곡 기대며 산비탈을 덮고 있는 형상이 가히 장관이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쌓인 돌무더기 사이로 붉게 물든 덩굴이 바위를 타고 올라 가을이 깊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운봉산의 암괴류는 신생대 제3기의 화산활동으로 땅 위를 덮은 현무암이 세월에 침식돼 무너지면서 생성된 것이다. 웅장한 암괴류 앞에서 당시 화산활동 규모에 대해 물으니 황재철 지질공원 해설사는 “큰 분화구를 봤다는 사람은 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라며 “산 자체는 돔 형식으로 돼 있지만 화산활동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운봉산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상에 올라서면 토성면 전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아름답게 늘어선 수평선에서 내륙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능파대·교암항·아야진항·청간리·봉포항을 지나 속초시까지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다. 넓은 초원과 바다를 충분히 감상한 뒤 몸을 돌리면 또 다른 비경이 펼쳐진다. 남쪽으로는 설악산 울산바위, 북쪽으로는 금강산이 병풍처럼 운봉산을 둘러 쌓고 있어 사방이 장관이다. 버릴 것 하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다 보니 어느덧 산행하며 흘린 땀도 식어 있었다.
/글·사진(고성)=한민구기자 1min9@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