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탐사S] 특허괴물, 끝나지 않은 전쟁…ICT 다음 타깃은 바이오

■본지, 43개 NPE 소송 전수분석

삼성·LG에 국내 소송 76% 집중

“일단 걸고 보자” 무차별 제소 후

‘로열티 합의 취하’ 10건 중 7건

특허괴물 공격에 기업들 냉가슴

미래산업 특허 쓸어담은 中 NPE

韓 기업 경계대상 1호로 떠올라

우리 기업에 대한 특허괴물의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허관리회사(NPE·Non Practicing Entity)가 국내 기업을 상대로 지난 8년간 580건의 소송을 남발한 것으로 나타났다. NPE는 특허를 사들여 로열티를 받아낼 목적으로 설립된 회사다.

5일 서울경제신문이 국내 기업을 상대로 특허소송이 잦은 NPE 43개의 소송 현황(이하 피고 수 기준)을 전수조사해 분석한 결과 2012년부터 2019년 6월까지 삼성이 212건, LG가 227건의 소송을 당했다. 전체 소송 건수 580건의 36%가 삼성에, 39%가 LG에 집중됐다. 양사를 합칠 경우 전체 소송의 76%다. 삼성, LG, 현대·기아차,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의 피소율은 무려 90%에 이른다. 특허괴물의 국내 주요 그룹사에 대한 소송 현황이 전체적으로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0615A01 국내 주요기업 특허괴물 피소 건수



43개 NPE 가운데 아카시아리서치그룹은 같은 기간 무려 181건, 유니록은 91건, 아이피에지는 40건의 특허소송을 걸었다. NPE의 공격 대상은 주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집중됐다. 전체 소송 건수의 72%가 ICT 분야였다. 특허소송의 대부분이 ICT에 집중되는 것은 최첨단 분야이기도 하지만 추상적 알고리즘으로 구성된 소프트웨어(SW) 특허의 범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특허괴물이 일단 걸고 보자는 무차별 소송을 진행하는 것도 이 같은 특성에 기인한다. 실제 특허괴물이 제기한 소송의 396건(68.2%)이 로열티 합의 등으로 취하됐다. 반면 우리 기업이 끝까지 재판을 진행해 승소한 경우는 20건(3.4%)에 불과하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특허전문 변호사는 “특허괴물들은 일단 관련 기업 전체를 대상으로 소송을 걸어놓고 이를 지렛대 삼아 개별 협상으로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며 “관련 기업들이 공동 대응하는 것이 소송비용 절감과 승소 확률을 높일 수 있는 길”이라고 말했다.

특허관리회사(NPE·Non Practicing Entity)의 특허소송은 생각보다 집요했다. 특허괴물들이 국내 기업들을 공격하는 방식은 일정 패턴을 갖추고 있었다. 자회사를 페이퍼컴퍼니로 만들어 일단 소송을 제기한 다음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로열티를 받고 합의하는 방법이 가장 일반적이다. 보유한 특허를 다 소진하면 신규 특허를 사들여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도 발견됐다.

특허괴물들의 주요 타깃은 대기업들이었다. 뜯어먹을 게 많기 때문이다. 최근 중소·중견 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소송도 빈번하지만 특허소송의 대부분은 대기업 계열 제조업체에 몰려 있다. 그동안 국내 기업의 특허소송의 당사자가 대부분 삼성·LG전자였던 이유다.

올해 들어 발생한 NPE 소송을 살펴보면 기존에 보지 못한 새로운 특허괴물의 이름도 다수 등장한다. 특허괴물의 세대교체인 셈이다. 43개 NPE 가운데 국내 기업을 상대로 가장 많은 소송을 제기한 아카시아리서치그룹의 경우 지난 2015년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2017년 이후 활동이 뜸해졌다. 반면 유니록은 2017년 이후 본격적으로 소송을 제기하고 있고 아이피에지의 경우는 오랜 기간 꾸준히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최근 국내 기업의 경계 대상 1호는 단연 유니록이다. 유니록은 조세회피처인 룩셈부르크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놓고 수익을 올리는 특허괴물이다. LG전자는 2017년 한 해에만 8건을 제소당했다. 4월에는 삼성전자의 신제품인 ‘갤럭시 폴드’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유니록은 갤럭시 폴드와 갤럭시 시리즈가 자사가 보유한 ‘안드로이드 빔 수신’에 대한 특허권과 무선 네트워크통신에 대한 특허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카카오·네이버도 유니록의 발톱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특허괴물의 특징은 걸릴 때까지 계속 건다는 것이다. 일단 소송을 제기해놓고 기업들의 반응을 떠본다. 기업들이 맞서면 또 다른 소송으로 공격하면서 진을 뺀다. 기업 입장에서는 무척 피곤한 일이다. 특허소송은 소송이라는 특성상 외부에 알리기도 어렵다. 기업의 이미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이 특허소송 피소 사실을 쉬쉬하며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다. 피소 사실이 알려져도 적극 대응하기 어렵다. 설사 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막대한 소송비용이 들어간다. 특허괴물과 싸워서 이겨봐야 본전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특허괴물을 상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특허소송에서 특허권을 무력화시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제조사와 소송을 하는 경우 보유한 특허권을 활용해 반소를 제기하거나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특허괴물을 상대로는 이런 전략을 사용할 수 없다.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한국 기업을 상대로 한 특허소송 중 절반(46%·132건)이 특허괴물에 의해 진행됐다. 그러나 기업들은 특허괴물을 상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특허소송은 대부분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에 집중돼 있다. 최첨단 기술을 다루는 분야이다 보니 관련 특허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스마트폰만 하더라도 통신 분야는 물론 디자인 의장등록권 등 수백개의 특허가 포함돼 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되면 관련 특허의 중요성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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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특허괴물의 소송 건수는 줄어들며 다소 주춤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 특허소송은 늘고 있다. 특히 중국 특허괴물들의 움직임이 주목된다. 과거에는 주로 미국 특허괴물들이 소송을 걸었다면 앞으로는 중국 특허괴물들이 경계 대상 1호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특허청의 한 관계자는 “NPE의 소송은 특허 라이선싱 체결을 통한 수익화가 목적이기 때문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정보통신 분야의 대기업에 집중됐던 것이 사실”이라며 “비록 소송은 대기업에 집중돼 있지만 이들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다수의 중소·중견 기업도 소송 리스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특허괴물의 공격 분야도 조만간 ICT 분야에서 바이오 분야로 바뀔 공산이 커졌다. 미국 특허분석 및 특허거래 전문기업 AST에 따르면 올해 2·4분기 지식재산 거래 시장에서는 287건의 신규 특허 매매가 이뤄졌다. 지난 1·4분기와 비교할 때 소폭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부터 분기당 300건 안팎의 신규 특허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 10년간 가장 많은 특허 거래가 이뤄졌던 소프트웨어 분야를 제치고 건강 및 의약 부문에서 가장 많은 특허 거래가 이뤄진 것으로 분석됐다. 소프트웨어 분야는 3위로 떨어졌다. IBM이 1,175건의 자산을 퓨어스토리지에 매각한 것이 눈에 띈다. NPE의 소송도 1·4분기 15건에서 76건으로 다시 껑충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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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 서방이 챙긴다’. 한 국제특허 전문 변호사는 특허괴물에 대해 이같이 설명했다. 작은 돈으로 특허를 사들여 기업들을 상대로 무차별 소송을 남발하며 돈을 벌어들이는 행태를 비꼰 것이다. 특허괴물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허소송이 큰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모펀드들까지 전주로 등장했다. 특허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모펀드들이 뭉칫돈을 싸들고 특허관리회사(NPE)로 몰려들었다”며 “NPE 시장이 본격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관련 시장이 커지면서 특허를 이들 회사에 연결해주는 특허 브로커까지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기 특허소송은 기업끼리의 소송이었다. 기술을 가진 기업이 후발기업의 시장 진입을 막기 위해 특허를 무기로 소송을 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폴라로이드가 코닥을 상대로 15년 동안 벌인 특허소송이 대표적이다. 특허괴물로 불리는 NPE가 등장한 것은 지난 1990년대 후반이다. 제품을 직접 제조하거나 판매하지 않으면서도 보유한 특허를 무기로 다른 기업을 공격했다. 특허 자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1세대 특허괴물로 불리는 인터디지털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인터디지털은 휴대폰 통신 분야 특허를 무기로 삼성전자·LG전자·노키아 등으로부터 막대한 특허료를 받아냈다.

세계 최대 특허괴물로 불리는 인텔렉추얼벤처스(IV)는 2세대 특허괴물의 시대를 열었다. IV는 각 분야의 보유 특허만 3만5,000개, 페이퍼컴퍼니 형태로 거느리는 자회사는 하도 많아 집계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 전방위 소송으로 악명을 떨쳤다.

최근 나타난 흐름은 기업들이 특허 AST·RPX 같은 특허 방어펀드를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일명 디펜시브 특허풀이다. RPX는 참여기업들이 사업 분야별로 필요한 특허를 미리 사들여 회원사가 공유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소니·시스코·엡슨·삼성전자·LG전자 등이 가입돼 있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업들의 특허 리스크를 관리해준다. RPX는 2008년 설립돼 창업 3년 만에 나스닥에 상장하기도 했다. 최근 10년 동안 급성장하며 특허 관련 여러 개의 자회사를 거느리고 있기도 하다.



특허관리회사를 선과 악을 가르는 흑백논리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물론 NPE에 피소된 기업은 괴롭다. 하지만 NPE가 수많은 개인연구자·대학·연구기관에는 특허권을 인정해주는 구세주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 자금력 부족으로 사장될 뻔한 수많은 특허가 NPE를 통해 시장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당장 상용화되지 못하는 특허를 NPE가 수면 위로 끌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오성환 법무법인 바른 특허전문 변호사는 “특허기술을 개발하고도 자금이 없어 사업화하지 못하는 벤처기업에 자금 조달처가 될 수 있다”며 “대학 및 연구기관이 특허기술 거래를 통해 연구개발의 노력과 비용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NPE 덕분에 기업들도 지식재산권(IP) 비즈니스의 중요성에 눈을 뜨는 계기가 됐다. NPE의 소송에 대응하면서 특허의 재산권 이상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단순히 현금 사냥꾼이 아닌 지식산업 중개상으로서 NPE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다. 반면 여전히 국내에서는 NPE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NPE가 특허를 상용화해 제품을 만들지 않고 특허권을 행사해 수익을 올리는 특성에 기인한다. 국내의 한 대기업 관계자는 “보유특허를 무기로 소송을 남발해 기업의 발목을 잡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기술 개발에 사용할 비용까지 소송을 방어하는 데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탐사기획팀=김정곤기자 mckids@sedaily.com

김정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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