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부터 시행되는 국제해사기구(IMO)의 선박유 황 함량 규제 ‘IMO 2020’을 앞두고 잔사유인 벙커C유와 휘발유·등유·경유 제품의 가격 차가 벌어지고 있다. 선박 연료 시장에서 황 함량 수준이 높은 벙커C유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어서다. 국내 정유사들이 벙커C유 등을 원료로 고부가가치 제품을 만들어내는 고도화시설에 수조원을 투자해온 만큼 내년부터 수혜가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10일 페트로넷에 따르면 지난 7일 경유(황 함량 0.05% 제품 기준)의 배럴당 가격은 75.51달러인 반면 벙커C유(황 함량 3.5% 380cst 제품 기준) 가격은 그보다 30달러 이상 낮은 43.76달러를 기록했다. 경유와 벙커C유 가격 차이는 올 7월 약 8달러에서 9월 4달러 내외까지 좁혀진 뒤 10월부터 급격히 확대되기 시작했다. 경유보다는 벙커C유 가격의 변동 폭이 컸다. 8월만 해도 40~50달러선이던 벙커C유 가격은 9월 내내 상승하며 한때 79.81달러에 달하기도 했으나 이후 고꾸라지기 시작해 10월2일 이후로는 50달러를 넘지 못했다.
이는 최근 선박 연료 시장에서 고유황 벙커C유의 판매가 급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최대 선박유 시장인 싱가포르에서 지난해 94%에 달했던 고유황 벙커C유의 비중은 올해 9월 85%까지 하락했다. IMO가 내년 1월1일부터 황 함량 상한선을 3.5%에서 0.5%로 대폭 낮추기로 하면서 시장에 먼저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IMO 2020’에 따른 수혜가 예상됐던 국내 정유사들이 드디어 빛을 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국내 정유사들은 일반 정제설비를 가동할 때 나오는 벙커C유 같은 잔사유를 휘발유·등유·경유 등 제품으로 만드는 고도화설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벙커C유 가격이 떨어져도 상대적으로 고도화율이 낮은 일본이나 중국 정유업체보다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IMO 규제에 대비해 감압잔사유탈황설비(VRDS)에 1조원을 투자한 SK이노베이션(096770)이 직접적인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고유황 벙커C유를 저유황중유(LSFO) 또는 경유로 만들어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은 내년 VRDS 완공 후 하루 3만8,000배럴 수준의 압도적인 LSFO 생산능력을 보유하게 되는 만큼 LSFO 가격이 오를수록 수혜는 커질 수 있다.
지난해 11월 잔사유고도화설비(RUC) 증설을 완료한 에쓰오일의 수익성도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조현렬 삼성증권 연구원은 “정제마진이 1달러 개선될 때 에쓰오일은 2,000억원, SK이노베이션은 4,000억원의 연간 영업이익 상승 효과가 있다”며 “내년에 정제마진 개선으로만 에쓰오일은 8,200억원, SK이노베이션은 1조7,600억원의 영업이익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선박 내 스크러버(탈황장치) 설치율이 예상보다 저조하다는 점도 정유업계의 기대감을 높이는 요인이다. 앞서 선박회사들은 비싼 LSFO를 구매하기보다 배에 스크러버를 설치해 직접 황산화물 배출을 줄이는 방식으로 IMO 규제에 대응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러면 벙커C유 수요가 줄지 않고 이를 고도화해 고가에 판매하는 국내 정유사들의 수익성도 떨어지게 된다. 하지만 내년까지 스크러버를 설치한 선박 수는 업계 예상의 절반 수준인 3,000척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산된다.
IMO 규제의 이익 개선 효과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규제에 반발하는 국가들이 나오고 있는데다 액화천연가스(LNG) 추진선 전환 등 변수가 많아 규제 효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LSFO 시장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내년이 돼봐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