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집 뒷마당에는 오렌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50년은 족히 넘겼음직한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이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키운 개가 뛰놀았다. 수명이 다했는지 언젠가부터 오렌지 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했고 말라 들어갔다. 나무를 자를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 잘린 오렌지 나무의 굵은 가지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껍질들을 성근 잔디에 남기기 시작했다.”
미디어아트로 유명한 중견작가 심철웅(61)이 34년 만에 영상이 아닌 회화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오는 21일까지 헬리오아트 정동 전시관에서 열리는 ‘그가 남긴 것들’이다. 심 작가가 그림으로 개인전을 연 것은 지난 1985년 서울대 미술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할 때가 마지막이었다. 공간과 역사의 문제를 예리한 영상작업으로 조망하던 작가가 자신의 집에 있던 나무 한 그루를 통해 개인의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그리움’의 정서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됐다.
작품 소재는 말 그대로 나무껍질이다. 평범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다. 굵고 진하게 그은 선과 나무의 결을 이루는 붓질 속에 시간과 흔적이, 기억과 추억들이 내려앉았다. 늙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껍질이라지만, 그 자체로 인간의 형상을 은유하는 듯하다. ‘빈 포옹’ ‘남은 몸짓’ ‘쇠락한 대화’ ‘따스한 대화’ 등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나무껍질은 삶의 단편들을 들춰낸다. 배경을 흰색으로 처리함으로써 군더더기 없는 상태에서 실존 그 자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2006년 강남구 청담동에 설립된 헬리오아트가 강북 중구 정동길에 새 전시관을 마련한 후 처음 여는 분관 개관전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과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 맞닿은 정동은 최근 근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402호로 지정된 옛 신아일보 별관 1층에 자리잡은 헬리오아트는 앞으로도 주요작가의 쇼룸 성격으로 기획전을 이어갈 예정이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