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꼭 빨간색 바지를 입고 경기하는 김세영(26·미래에셋)은 ‘마법사’로 통한다. 잊을 만하면 꼭 기적 같은 승부를 연출해왔기 때문이다.
여자골프 역사상 가장 큰 우승상금이 걸린 대회가 시즌 마지막 일정으로 열린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그래서 더 김세영에게 기대를 걸었다. 25일(한국시간) 미국 플로리다주 티뷰론 GC(파72)에서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CME그룹 투어 챔피언십(총상금 500만달러). ‘빨간 바지의 마법’은 이번에도 통했다. 김세영은 이날 마지막 18번홀(파4)에서 우승상금 150만달러(약 17억6,0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150만달러는 남자부인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의 우승상금과 비교해도 많은 편이다. 미국 골프채널에 따르면 지난 시즌 PGA 투어 46개 대회 중 32개 대회의 우승상금이 150만달러 미만이었다.
‘역전의 여왕’ ‘이글의 여왕’으로도 불리는 김세영은 마지막 날 17번홀(파3) 홀인원으로 우승한 2013년 국내 투어 한화 클래식, 18번홀(파4) 칩인 파로 만든 연장에서 샷 이글로 끝내버린 2015년 롯데 챔피언십, LPGA 투어 최다 언더파와 72홀 최소타 기록을 쓴 지난해 손베리크리크 클래식 등으로 빼곡하던 자신의 ‘마법 리스트’에 또 하나의 명장면을 추가했다.
사흘 내내 선두를 달리며 1타 차 리드로 출발한 김세영은 마지막 날 잦은 보기 탓에 마지막 3개 홀 연속 버디를 잡은 찰리 헐(잉글랜드)에게 공동 선두를 허용했다. 먼저 경기를 마친 헐은 연장을 기다리며 열심히 퍼트 연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세영은 마지막 18번홀(파4)의 ‘끝내기 버디’로 헐의 연습을 헛되게 만들었다. 8m나 되는 먼 거리에 오른쪽으로 휘는 내리막 경사였지만 김세영의 퍼터를 떠난 공은 뭔가에 끌리듯 홀 가장자리를 타고 들어갔다. 150만달러짜리 퍼트였던 셈이다. 4라운드에 버디 5개와 보기 3개로 2타를 줄인 합계 18언더파의 1타 차 우승. 첫날부터 내내 선두를 지킨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이기도 했다. 김세영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은 채 짜릿한 순간을 만끽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2015년 3승으로 신인상을 탔던 김세영은 다섯 시즌 만에 LPGA 투어 통산 10승을 채웠다. 10승 중 연장 우승이 네 번이고 연장 전적은 4전 전승이다. 이 대회 전까지 공동 8위·6위·공동 9위·공동 4위를 거친 뒤 시즌 3승째를 올려 2017·2018년 각각 1승으로 마쳤던 아쉬움을 깨끗이 씻었다. 허리 통증으로 고생하다 스윙을 바꾼 뒤 3승을 몰아쳤다. 통산 10승은 박세리(25승)·박인비(19승)·신지애(11승)에 이어 한국 선수로 네 번째 대기록이다. 김세영은 2014년 도입된 시즌 포인트 제도인 CME글로브 레이스에서도 한국 선수 최초로 1위를 차지했다.
경기 후 김세영은 “사실 마지막 홀에서 투 퍼트만 해도 우승하는 것으로 잘못 알았다. 넬리 코르다(미국)만 이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퍼트 뒤 리더보드를 보고는 헐이 바로 아래 있어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돌아봤다. 그는 “한국에서 첫 우승 했을 때 받은 상금이 10만달러 정도였다. 이렇게 큰 상금을 받았으니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다”면서 내년 목표는 “올림픽 출전과 시즌 4승”이라고 밝혔다. 김세영의 캐디인 폴 푸스코도 큰돈을 얻게 됐다. 캐디는 보너스로 우승상금의 10%를 받는 것이 보통이다. 1억7,600만원을 받을 푸스코는 “김세영의 골프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 시즌 7승도 충분히 가능한 선수”라고 칭찬했다.
1타 차 2위였던 코르다는 1타를 줄이는 데 그쳐 대니엘 강(미국)과 같은 16언더파 공동 3위로 마쳤다. 유소연은 12언더파 공동 9위다. 공동 5위였던 고진영은 1타밖에 줄이지 못해 11언더파 공동 11위로 내려갔으나 상금(약 277만3,000달러)과 평균타수 1위(69.062타)를 지켜 주요 부문 타이틀을 휩쓸었다. 상금 2위는 약 275만3,000달러의 김세영, 평균타수 2위는 69.408타의 김효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