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떠밀지는 마

한기석 논설위원

정치·경제계 곳곳서 86용퇴론 회자

젊은 세대 힘들게 사는 것 안됐지만

헬조선 고통 만든 주범이 86은 아냐

곧 정년...때 되면 알아서 사라질 것

한기석



얼마 전 아는 형님을 만났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지 연구했다고 말했다. 퇴직 이후 삶을 얼마나 멋지게 준비했는지 귀동냥을 하려는데 느닷없는 ‘출퇴근 시간 전철 안 타기’를 얘기했다. 그는 바쁜 출퇴근 시간에 사람 붐비는 전철에서 등산복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보기 싫었단다. 젊은 사람은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힘들게 직장에 다니는데 나이 든 사람은 한가로이 시간을 희롱하는 것 같아 불편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생하는 젊은이가 한 사람이라도 더 앉을 수 있도록 출퇴근 시간만큼은 피하겠다는 게 그의 다짐이다. 그가 연구한 것은 몇 가지 더 있다. 70세가 되면 운전 면허증을 반납한다. 순발력이 떨어져 혹시라도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 80세가 되면 국민연금을 절반만 받는다. 나이가 들수록 돈 쓸 곳은 줄어든다. 이런저런 투표를 하지 않는다. 곧 죽을 텐데 내가 없는 세상일에 참견하면 안 된다.

형님의 얘기를 들은 사람은 두 명이다. 둘 다 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 대학교에 다녔다. 86이다. 형님은 79학번이지만 반올림하면 우린 모두 86이다. 퇴직하면 몸 만들고 여행 가고 당구나 즐기면서 놀 궁리만 하던 우리에게 형님의 말씀은 정신이 바짝 들게 등을 내려친 죽비였다. 그래도 젊어서 1980년대를 살아낸 사람이라면 마땅히 떠올리고 실천해야 할 삶이 아닌가.


사회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요구하기에 앞서 내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실로 오랜만에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순간 ‘86용퇴론’이 들렸다. 청소 막 하려는데 청소하라는 소리를 들은 기분이랄까. 86용퇴론의 대표격인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2030세대가 헬조선에서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N포세대가 돼 고통받는 게 86의 국정운영 결과”라며 “86은 이 문제에 답을 내지 못했으니 물러가고 숙제는 다음 세대가 풀도록 하자”고 주장한다. 그의 선의를 알면서도 반발심이 생긴다. 86용퇴론은 지금 세대가 겪는 어려움이 전 세대 잘못 탓이니 잘못한 전 세대는 물러나야 한다는 논리적 구조를 갖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에 잘못을 저질렀다. 1950년대생 1970년대 학번, 75는 무엇을 했나. 1940년대생 1960년대 학번, 64는 또 무엇을 했나. 그들이 사회의 주축일 때 생긴 정치 괴물이 전두환 독재요, 경제 괴물이 외환위기 아닌가. 그들이 전두환 독재와 외환위기를 일으키지 않았듯이 86도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고통을 만들어내지 않았다. 86의 국정운영 결과라는 말도 이상하다. 지금 86이 대통령을 하고 있나 국회의장을 하고 있나. 그저 장관 몇 명, 국회의원 몇 명이 있을 뿐이다.

관련기사



‘불평등의 세대’라는 책을 보니 86용퇴론은 정치인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86인 기업 임원은 다른 세대보다 더 많다. 86은 조직에서 더 오래 생존하고 과대 대표돼 있다. ‘20년에 걸쳐 한국의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래 세대의 성장을 억압하며 최고위직을 장기 독점하고 있다’고 책은 말한다. 이렇게 된 것은 86이 정년을 50대 중반에서 60세로 연장하고 임금피크제처럼 86의 이익을 침해하는 임금 유연화는 거부하며 현대차와 기아차에서 보듯 자식의 기득권도 인정했기 때문이란다. 정년을 늘린 사람은 86이 아니라 국민이며 임금피크제는 지금 많은 기업이 도입해 대세가 됐으며 자식의 기득권 인정은 현대차와 기아차만의 사례로 그나마 사문화됐다.

86용퇴론을 듣는 게 불편하다. 젊은 세대가 힘들게 사는 것은 안됐다. 하지만 그것이 86탓은 아니다. 86이 무슨 잘못을 얼마나 했기에 멀쩡하게 하던 일을 그만두라고 하나. 86이 뭘 얼마나 더 갖고 있기에 가진 것을 내놓으라고 하나. 86은 그저 정년이 될 때까지 잘리지 않고 돈 벌어 처자식 먹여 살리는 소박하면서 절실한 꿈을 꾸는 가장일 뿐이다. 등 떠밀지 않아도 때 되면 간다. 그리고 그 때도 거의 됐다. /한기석 논설위원 hanks@sedaily.com

한기석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