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펀딩감이네.” “린하게 하자.”
스타트업들이 몰려 있는 경기도 판교나 서울 강남 테헤란로 사무실을 들어가 보면 쏟아지는 낯선 용어에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 일반인들이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생소한 것들인데 스타트업 직원들은 이를 ‘판교어’나 일반인들이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판교 사투리’라고 부르고 있다. 초중학생들이 즐겨 쓰는 약어나 은어를 가리켜 ‘초딩어’ ‘중딩어’라고 부르듯이 스타트업 세계에서도 다양한 은어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정보기술(IT)이나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끼리 즐겨 쓰던 말이 스타트업의 독특한 조직문화와 결합돼 새 언어로 힘을 얻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우선 스타트업 내부에서는 회의를 할 때 ‘린(Lean)하게 하자’는 말을 자주 쓴다. 지금은 스타트업 전용처럼 된 ‘린’은 사실 1960년대 도요타가 미국 포드의 생산시스템에서 핵심만을 골라 도입한 최적화된 생산시스템을 의미했다. 하지만 판교에서는 컨베이어벨트 위의 효율화보다는 그들의 아이디어를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일단 실행해서 시장의 피드백을 받으며 존재감을 드러내라는 주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린하게 하자’는 의미에 대해 28일 한 스타트업 관계자는 “우리가 마주한 일은 뭉뚱그려져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잘게 쪼개 빠르게 처리하자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군더더기 없는 일처리를 요청할 때 주로 쓰이는 것인데 ‘판교어’ 안방마님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철저한 업무처리 등으로 조직 내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는 사람을 두고 일반 회사에서는 ‘에이스’라고 표현하지만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그 사람 펀딩감”이라고 평가한다. 스타트업 특성상 외부의 자금을 받는 펀딩이 기본이다 보니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초기 스타트업의 경우 제대로 된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 보니 업무분장이 애매해 구성원들이 과도한 업무를 떠안는 경우가 많다. 실제 초기 스타트업일수록 5명 내외의 소수정예가 모여 일하다 보니 한 사람이 기획에 마케팅·인사·회계까지 두루 맡는 사례가 빈번한데 이를 가리켜 ‘올라운더(all rounder)’라고 부르는 것도 대표적인 판교어로 통한다. ‘OKR(Objective Key Results)’은 인텔에서 시작해 구글이 받아들인 후 이제 판교까지 퍼진 성과관리 기법으로 3개월마다 팀과 개인단위로 세 개의 목표와 세 개의 핵심결과를 정하고 공개된 OKR에 따라 서로에게 피드백을 주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통상 최우수 선수를 뜻하는 ‘MVP’는 판교에서 ‘최소 기능을 갖춘 제품’으로 의미가 바뀌는 사례다. 아이디어만 반영한 미완성 제품이지만 존재만으로도 사용자에게 가치를 지닌 결과물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또한 서비스 론칭이나 업그레이드를 앞두고 고객을 반반씩 나눠 각기 다른 안을 적용하고 반응을 비교하는 ‘A/B 테스트(Test)’도 스타트업이 즐겨 채택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최근 콘텐츠 플랫폼 브런치에 ‘판교 사투리’라는 용어를 언급해 화제를 모은 박창선 애프터모먼트 대표는 “스타트업 종사자들의 이직이 잦은 편이라 판교나 강남·성수 일대에 스타트업만의 작은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다”며 “그들만의 용어와 인재풀 등이 생기면서 하나의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고 ‘판교용어’나 ‘판교 사투리’ 역시 그것을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임직원이 수천명이 넘는 회사라면 꿈도 꾸지 못할 용어도 이곳에서는 생명력을 얻는다. 기존에 론칭했던 사업이 정부 규제나 시장환경 때문에 제대로 추진되기 어려울 경우 창업자는 ‘비즈니스 피봇’을 통해 타깃 소비자나 서비스 방식을 바꿔버리는 사례도 있다. 이때 등장하는 ‘피봇’도 판교어로 통한다.
성장기에 놓인 스타트업은 외부에서 인력 충원을 많이 하게 되는데 이들을 위한 회사 사용 설명서와 인기 제품 등을 담은 ‘웰컴키트’을 주거나 소속감이나 연대감을 부여하기 위해 회사 로고가 박힌 ‘후드집업’을 입도록 하는 것도 대표적인 판교 코드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