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핀테크 업체 보맵 사무실에는 ‘보맵은 이렇게 일한다’는 제목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다. ‘고객에게 집중하라’ ‘제품에 집중하라’와 같은 원칙은 여느 회사에서 보기 쉽지만 ‘일단 시작하라’와 ‘도전하고 실패하라’는 원칙은 단연 스타트업답다. 류준우(40) 보맵 대표가 직접 써내려간 이 지침들은 모두 창업 이후 그가 겪은 숱한 실패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류 대표는 창업 스토리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게 없다. 대학 졸업 이후 SGI서울보증보험에 다니다 기업의 재무제표와 각종 서류를 검토하는 일보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차에 친구들과 함께 컵케익 사업에 공동 투자했고 이때 자기 사업을 하는 데 매력을 느꼈다. 그러던 중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동안 가입한 보험계약을 살펴볼 일이 생겼다. 보험회사 직원인데도 당시 계약 내용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보험을 해지하기도 쉽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험업 종사 경력을 살려 보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사업을 해보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창업과 동시에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다면 이 드라마는 뻔하다.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싶을 만큼 2016년에 내놓은 첫 아이템은 처절한 실패로 끝났다. 9일 서울 강남 보맵 사무실에서 만난 류 대표는 “계약자들이 직접 보유한 보험계약 증서를 촬영해서 업로드하면 이를 토대로 계약을 분석하고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해준다는 콘셉트였다”며 “당시 내놓은 서비스인 ‘레드박스’의 출시 이후 한 달간 다운로드 건수는 10건에 불과했다”며 피식 웃었다. 직원들 월급조차 제때 줄 수 없던, 숱한 위기의 나날이 이어졌다.
다행스러웠던 점은 류 대표의 가장 큰 미덕이 ‘실패에서 교훈을 얻을 줄 안다’는 것이었다. 그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류 대표는 보험 계약부터 해지까지 지인들이 경험한 보험의 문제점을 파고들었다.
“회사에서 들어준 보험, 부모님이 골라준 보험, 주변인의 부탁으로 가입한 보험은 많지만 정작 권리를 누려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좋은 상품을 간편하게 가입하는 것보다 내가 들어놓은 보험부터 제대로 알고 싶다는 니즈가 강한 건 당연했죠. 그래서 숨은 보험을 찾아 보장내역을 한눈에 보게 해주고 진짜 내게 필요한 보험이 무엇인지 찾아주는 데 집중했어요. 그때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경영원칙도 바꿨다. 초기에는 보험사 출신의 개발자와 디자이너의 경우 채용 시 가산점을 부여했지만 오히려 보험사 근무 경력이 없는 이들을 우대하기 시작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만큼은 기성 보험사의 틀을 뛰어넘어야 고객 친화적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현재 앱 다운로드 수는 170만이다. 이들이 남긴 다양한 데이터는 비대면 유통 플랫폼으로서 보맵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다. 이를 바탕으로 보맵은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 상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보험사가 최적의 상품을 제조하도록 독려한다. 내년 목표치인 500만 다운로드를 넘어서면 플랫폼으로서 보맵의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진다.
“사용자가 늘어날수록 모이는 데이터도 방대합니다. 이 데이터를 유용한 데이터로 정제하는 데 상당한 투자를 하고 있어요. 데이터로는 카카오나 네이버가 앞설 수 있지만 수집한 데이터를 제대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이미 보맵이 진입 장벽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보맵 외에도 상당수 인슈어테크 업체들이 보험 관련 서비스를 선보이지만 국내 보험 시장의 유통 구조는 여전히 대면 채널 중심이다. 류 대표 진단에 따르면 국내 보험시장이 여전히 대면 채널 중심으로 운영되는 데는 설계사 중심의 공고한 유통 체계가 있다. 여전히 전체 신계약의 대부분을 끌어오는 설계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보험사들로서는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온라인 상품을 개발하고 채널 역량을 강화하는 대신 온라인 채널을 대면 채널의 보조 채널로만 활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상당수 설계사가 지인 영업 중심의 보험 판매에 매달리면서 보험 상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가입하고 결국 혜택도 받지 못하는 정보의 비대칭 문제를 키우면서 사회 전반에 보험에 대한 불신도 커졌다는 게 류 대표의 생각이다. 물론 이 같은 시장 현실이 보맵에는 기회가 됐다. 바로 믿을 수 있는 제3의 중계인이라는 콘셉트다.
보맵은 자금난을 겪던 시기에도 특정 보험사의 투자를 받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류 대표는 “보험 유통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으나 보험사나 법인보험대리점(GA)에 종속된 서비스들이 본래의 취지와 어긋나게 보험사나 GA의 영업 채널로 전락하면서 소비자의 선택권을 오히려 침해하는 경우가 많다”며 “앞으로도 보험사에는 가장 경쟁력 있는 상품을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소비자에게는 최적의 상품을 추천하는 채널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에는 생보뿐만 아니라 손보까지 수입보험료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나오지만 류 대표는 오히려 디지털 보험 시장은 불황은커녕 이제 막 성장기에 진입한 초기시장이라고 보고 있다. 류 대표는 “보험사가 아닌 제3자가 보험 소비자가 가진 욕구와 불만을 해결해줄 서비스를 내놓는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며 “글로벌 보험사들이 보맵의 글로벌 성장 가능성을 높게 점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류 대표는 국내 보험 핀테크 가운데서 유일하게 악사와 알리안츠의 초청으로 최근 독일 핀테크 행사에 참석했고 인슈어테크 분야 주목할 만한 핀테크 톱2에 선정되기도 했다.
“설계사 중심의, 기성세대를 타깃으로 한 보험시장은 포화상태겠지만 보험에 익숙하지 않은 2030세대의 보험시장은 여전히 블루오션이에요. 택배보험이나 택시승차보험 같은 생활 밀착형 보험 시장은 이제 막 태동하고 있고 필요한 보험만 골라서 가입할 수 있는 마이크로 보험 시장은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사후 남겨질 가족을 위한 무거운 보험이 아니라 본인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 보험이라면 젊은 세대의 마음을 충분히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미 확인했습니다.”
보험이 가벼워질수록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해소될 것으로 보고 있다. 류 대표는 “아이폰의 등장 이후 스마트폰 보험이 대중화된 것처럼 앞으로는 드론부터 각종 전자제품까지 내가 아끼는 상품에 보험을 드는 게 당연해질 것”이라며 “보상 경험이 쌓이다 보면 돈만 드는 금융상품이 아니라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안전장치라는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 자체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맵은 ‘고객 편에 선 보험 중계자’로서 신뢰를 쌓아가고 있다. 이런 신뢰는 고객 데이터를 확보하고 그에 맞는 보험 상품을 추천하는 데 필수적이다. 고객들이 기꺼이 보맵에 개인정보를 넘겨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분석 시장이 활성화되면 대다수 보험사는 이를 활용한 보험 마케팅에 뛰어들겠지만 소비자들이 보험사에 민감 정보를 넘기기를 꺼리는 까닭에 사업화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에 류 대표는 “보맵은 고객의 유전자 데이터나 가족력·생활습관 등을 분석해 반드시 가입해야 할 보험을 추천해주지만 이 정보를 보험사에 넘기지는 않는다”며 “고객들은 민감 정보가 불리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걱정 없이 보장 설계를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전자 정보를 활용한 보험 추천 서비스 준비도 속도를 내고 있다. 올해 유전자 검사 스타트업 ‘제노플랜’과 협업해 차별화된 보장 추천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보맵 고객이 간단한 유전자 검사를 받으면 이를 분석해 보험을 추천해주는 방식이다.
내년에는 데이터 기반의 보험마케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첫 번째가 태아보험이다. 류 대표는 “지금까지 태아보험은 맘카페나 육아박람회에서 정보를 얻고 그곳에서 만난 설계사를 통해 가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최적의 상품보다는 설계사가 골라주는 가장 비싼 보험을 가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산부인과 결제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맵이 최적의 태아보험을 추천하는 것은 물론 임신 관련 질병을 예측하고 컨설팅할 수 있는 헬스케어 업체들과 연계한 서비스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기업보험 시장에서도 보맵은 점점 고객 편익을 극대화하는 중계자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다. 내년 개인정보보호배상책임보험의 의무보험 시행을 앞두고 인터넷기업협회는 보맵을 계약 주간사로 선정했다. 보맵은 여러 보험사에서 제안서를 접수해 자체 평가 결과 가장 우수한 점수를 받은 메리츠화재의 상품을 선정했다. 인기협 회원사들은 보맵을 통해 간편하게 보험에 가입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으며 일일이 보험상품을 비교하지 않고도 최적의 상품에 손쉽게 가입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막 만 4세를 넘긴 스타트업으로서 여전히 갈 길은 멀다. 류 대표가 늘 실패와 재도전을 이야기하는 이유다.
“연인에게 선물하는 귀가안심보험이라든지, 미청구한 보험금을 찾아내는 서비스라든지 기획단계에서 대박을 꿈꿨던 서비스와 상품이 실제로는 미적지근한 반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교훈을 얻는 게 낫죠. 그래서 빨리 도전하고 빨리 실패하는 게 보맵의 인재상입니다.”
류준우 대표 약력
△1979 서울 △1997 경북고 △2005 한국외국어대 경영학 △2005 서울보증보험 입사 △2010 재미케익 창업 △2013 모비데이즈 입사 △2015 보맵 창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