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만파식적] 스탈린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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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필스마이어 감독이 제작한 영화 ‘스탈린그라드’는 독일군 소위가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파병되면서 겪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렸다. 1942년 소련과 독일이 벌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추위와 배고픔까지 더해져 비극 그 자체였는데 당시 소련군 지휘관은 “이런 지옥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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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의 원래 이름은 ‘차리친’이다. 1589년 카스피해~흑해~발트해 등을 잇는 볼가강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하류 부근에 만든 요새가 도시의 기원이다. 교통의 요충지라는 이점 덕분에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교역 중심지로 번성했으며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목재·야금공장 등이 생겨나며 산업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차리친이 이오시프 스탈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적백내전(1917~1922) 때다. 1918년 당시 식량조달책임인민위원이었던 스탈린은 병사들을 이끌고 북카프카스에 식량을 징발하러 가던 중이었다. 식량 부족으로 열세였던 볼셰비키군을 지원하기 위해 스탈린이 처음으로 군사력을 사용했던 지역이 차리친이었는데, 스탈린은 당 서기장에 오른 후 ‘스탈린그라드’로 도시명을 바꿨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계기로 소련군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던 덕에 1945년 ‘영웅 도시’라는 칭호도 받았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에는 도시의 운명도 바뀌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여 1961년 도시명이 지금의 ‘볼고그라드’로 바뀌었고 24m 높이의 스탈린 전신상도 철거됐다.

스탈린 탄생 140주년(12월21일)을 전후로 볼고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스탈린을 기리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폭정의 상징이었던 스탈린이 새삼 소환되는 것은 유가 하락과 서방제재로 경제난에 처한 러시아 국민들이 소련의 영광을 추억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국민의 반(反)서방 정서를 부추기는 데 스탈린을 자주 동원한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붕괴됐던 이유가 자유와 평등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보면 ‘스탈린 향수’는 그 시절 그리움으로 끝나는 게 맞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정민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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