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캘리포니아 정도 크기의 일본이 열 배는 더 강한 미국과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태평양전쟁은 이해하기 어려운 전쟁이다. 결국 일본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고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의 원자폭탄의 상처를 안으며 3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뒤에야 백기를 들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일본 지도부도 처음부터 전쟁에 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2년 논픽션 부문 퓰리처상을 받은 책 ‘일본 제국 패망사’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일본군의 말레이반도와 필리핀 상륙, 가미카제 특공대 출격, 일왕의 항복선언까지를 다룬 태평양 전쟁 통사다. 전쟁사학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존 톨런드는 스기야마 하지메 일본군 총사령관의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메모 외에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나 인터뷰해 전쟁의 면모를 생생히 묘사했다.
당시 일본제국의 내각은 대미 개전을 둘러싸고 1년 가까이 지루한 논쟁을 벌였다. 동맹국인 나치 독일이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함께 한몫 챙겨야 한다는 욕심이 일었지만, 한편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무모한 일임을 누구나 직감했기 때문이다. 육군은 호전적인 말만 할 뿐 눈치만 보며 책임을 떠넘겼고, 해군도 승산이 없다고 잘라 말하지 못한다. 참다못한 일왕이 이례적으로 전쟁을 피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명령하지만, 서로 책임을 돌리는 가운데 결국 전쟁은 발발하고 만다.
패전 이후 일본 군인들은 회고록을 통해 일본군의 수많은 병폐를 지적하지만, 전후 논란은 주변국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여전히 무모한 전쟁을 일으킨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집중된다. 저자는 일본의 행정 시스템, 인간의 본성 등에서 모순적인 태도의 기원을 찾아낸다.
지난 7월 일본 정부가 수출 규제안을 발표한 이후로 일본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겁다. 수출규제 조치 직후 일본 역사 서적 판매는 전년 동기대비 두 배 가까이 급증했다. ‘일본 제국 패망사’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지난 8월 한국에 출간됐다. 수십만 명의 조선인이 차출된 태평양전쟁은 한국과 관련이 깊은 전쟁이지만, 지금까지 한국에 출간된 태평양전쟁 관련 서적은 일본 군인들의 수기가 대부분이었다. 제3자의 시각에서 태평양전쟁과 일본의 모순적 특징을 분석한 책이 50년 만에 번역된 것은 의미가 크다. 교보문고는 책에 대해 “일본불매운동이 한창인 시점에 화제가 됐던 것을 넘어 전쟁사의 방대한 기록을 일목요연하게 묘사한 퀄리티에 감탄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