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 긴장 격화로 각국이 중동에서 ‘석유 외교전’을 벌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동의 앞날이 전통적 외교관계보다 각국의 경제적 영향에 좌우될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지난해 12월27일 각의에서 호르무즈해협 인근에 독자적으로 해상자위대를 보내기로 의결한 일본 정부는 10일 파견 명령을 내렸다. 지난 8일 이란이 이라크 내 미군기지에 수십발의 미사일을 발사하자 야당이 안전 문제를 우려하며 파견계획을 철회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했지만 아베 신조 일본 정부는 중동 리스크가 고조되는 상황이라면서 오히려 일본 선박의 안전을 위해 파견이 시급하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이번 자위대 파견이 해양 팽창을 시도하는 동시에 원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란은 미국의 제재 여파로 글로벌 원유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아졌지만 미국과의 갈등이 고조될 때마다 호르무즈 봉쇄 카드를 꺼내며 전 세계를 위협해왔다. 호르무즈해협은 세계 원유 해상 수송량의 20%를 담당하는 요충지로 페르시아만에 인접한 사우디·아랍에미리트(UAE) 등이 원유나 천연가스를 싣고 아라비아해나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한다. 특히 해협을 통과한 원유나 원유 관련 응축물의 76%는 중국·인도·일본·한국 등 아시아 시장으로 건너간다. 국제사회가 이란의 호르무즈해협 봉쇄 우려가 현실화한다면 3차 오일쇼크를 불러올 수 있고 이는 가뜩이나 불투명한 글로벌 경제에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염려하는 이유다. 각국은 호르무즈해협 봉쇄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세계 경제와 정치 지형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3차 오일쇼크는 피해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내는 분위기다.
중동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국은 이란 사태와 관련한 대미(對美) 견제 수위를 예전보다 낮추는 모습이다. 중국은 이란에 힘을 실어줄 경우 자칫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봉쇄에 나서게 되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
이란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해협 봉쇄로 얻는 실익이 극히 낮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미국의 대이란 경제제재 이후 중국의 이란 원유 구매 규모는 지난해 4월 300만톤 수준에서 같은 해 11월 54만8,000톤 이하로 급감했지만 다른 국가들이 수입을 끊으면서 중국은 여전히 이란의 최대 수입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양국 교역규모도 2018년 기준 약 351억달러(41조원)에 달해 중국이 경제적으로 고립된 이란의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산유국인 러시아는 이란 사태가 에너지 시장에 악재가 될 가능성에 구애받지 않고 중동 내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분주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7일 시리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만난 뒤 곧장 8일 터키 이스탄불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회동하는 광폭 행보를 보였다. 러시아와 터키 양국 정상은 리비아 휴전을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채택하며 리비아 문제에 대한 개입 수위를 높였다. 일각에서는 이번 휴전 요구가 리비아에 매장된 석유를 노린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란과의 갈등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에서도 ‘석유의 정치학’을 엿볼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8일 이란 사태와 관련한 대국민 연설에서 “우리는 지금 세계 1위의 원유와 천연가스 생산국”이라며 “우리는 독립적이므로 중동 원유가 필요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과거와 달리 중동 전략과 석유 확보를 연계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미 CNN은 “미국에서 셰일오일 붐이 시작된 2010년대부터는 1970년대의 석유파동에 비해 외국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분명히 낮아졌다”면서 “최근의 원유 공급 차질이 더 이상 유가에 극적인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