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라고 하면 볼테르나 루소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계몽 사상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로 발현된 대표적인 사건인 ‘프랑스 혁명’이 18세기 일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 19세기 유럽 대륙을 휩쓸었던 혁명들을 피해갔던 만큼 계몽주의의 전통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영국에도 계몽주의 철학이 있으며, 그만의 고유성이 있다.
신간 ‘근대 세계의 창조’는 인류 사상의 역사에서 돋보이는 영국 계몽주의의 선구적 위상에 주목한다. 부제가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인 것처럼 영국 역사가인 저자 로이 포터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계몽주의의 역사를 상세하게 풀어내며 ‘계몽주의의 진정한 발상지는 영국’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스튜어트 왕가를 몰아내고 의회의 제한을 받는 군주정이라는 혼합 정체를 수립한 1688년 명예혁명에서 영국 계몽주의의 출발점을 찾는다. 이를 통해 인신과 소유의 안전이 보장됐고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폭넓은 관용과 여러 자유가 보장돼 헌정 체제가 사실상 자유화됐다는 것이다. 이후 로크는 종교적 관용을 설파하고 합리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새롭게 정제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다음 세대의 이신론과 무신론으로 나아가는 길을 닦았다. 베이컨은 새로운 학문 연구 방법론을 역설했고, 뉴턴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과학은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 세계에도 적용되는 새로운 해석틀로 기능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두 개의 영역으로 확장됐다.
저자에 따르면 영국 계몽주의는 가증스러운 것을 타파하라고 부르짖지도 않았고 혁명을 불러오지도 않았다. 영국에는 비국교도도 신앙의 자유를 누렸으며,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는 일도 없었다. 저자는 이런 의미에서 18세기 영국 사회는 이미 계몽을 이룩했고 그렇게 이룩된 체제를 정당화하고 수호하는 작업이 중요했다고 본다. 바로 여기에 영국 계몽주의만의 ‘영국성’이 존재한다. 이것을 저자는 “타도나 전복만이 아니라 새로운 체제의 창출과 정당화에도 헌신하는 계몽주의, 즉 혁명에 대한 ‘예방주사’와 같은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책은 18세기 영국의 계몽주의라는 쉽지 않은 주제를 다루는 데다 참고문헌만 500페이지, 총 1,200페이지에 달해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영국 주간지 ‘옵저버’의 평처럼 “엄청난 양의 학구적 정보를 부담스럽지 않게 전달”하며 “그 시대를 이해하고, 선명하게 바라보며, 당당하고 눈부신 당신의 시대 정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5만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