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호 전 사무금융노련 위원장 등 금융사 노조위원장 출신 노동운동 원로 12명은 이날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87년 민주항쟁 당시 노동조합 간부 12인이 민주노총에 고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노동운동이 투쟁만으로 더 담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사회적 대화와 같은 다양한 방식의 교섭전략도 저버려서는 안 된다”며 “제1노총이 된 것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갖고 있던 운동 철학에 성찰적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불참하고 있는 것이 올바른 선택인지 묻고 싶다”며 “30년 전에는 노동운동이 우호적 반응을 얻었는데, 지금 보면 여러 곳에서 고립돼 있다. 제1노총으로서 사회적 책임에 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노조의 보호를 받는 10%의 중심부 노동이 전체를 품기 위해 그동안 어떤 노력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추진해왔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기업별 노조 체제에서 대기업 정규직이라 열을 받으면 중소기업 비정규직이라 넷도 못 받는 세상이 됐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을 주도한 최 전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가 ‘시다(보조)’들에게 자신의 차비로 풀빵을 사주고, 일터에서 집까지 걸어서 간 사회연대라는 ‘풀빵 정신’과 공동체주의에 기반한 전략적 사고를 바탕으로 민주노총이 운동 철학에서 변화를 조속히 만들어가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민주노총은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불참해왔으며 새로운 노정교섭 틀을 주장하고 있다. 오는 17일 열리는 정기 대의원대회에서도 경사노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할 가능성은 작다.
/세종=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
“勞, 30년 대립·투쟁프레임 벗어나야” 주문
[노동계 원로들 쓴소리]
“디지털경제 등 사회 급변하는 데 노사정 함께 풀어야 미래 답보”
‘경사노위 합류’ 계속 조언에도 민노총은 ‘강경투쟁’ 고수할 듯
5일 노동계 원로들이 ‘제1노총’ 자리에 올라선 민주노총을 향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고 쓴소리를 내놓은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형성된 30여년간의 대립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에서 탈피하라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현재 민주노총이 과거 전태일 열사의 ‘자기 희생과 연대정신’을 잃고 상위 10% 조직 노동자의 이해만 대변하면서 국민들의 외면을 받아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노총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어려움에 더 관심을 갖는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 출현 등 4차 산업혁명 시대 대비에 정부나 기업과 협력해야 한다고도 했다. 30년 전 민주노총 출범에 기여한 이들 원로는 이론이나 이념을 앞세우지 말라고도 고언했다.
최재호 초대 사무금융노련 위원장 등 노동운동 원로들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에 요구한 사항은 ‘사회적 대화에의 참여’로 압축된다. 제1노총에 걸맞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면 경제사회노동위원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라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운동이 ‘개별 기업에 국한된 임금투쟁’이나 ‘이름뿐인 총파업’을 넘어서 더 담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며 “투쟁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면 사회적 대화와 같은 다양한 방식의 교섭전략도 저버려서는 안 됨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원로들은 민주노총이 노조가 조직되지 못한 비정규직이나 이른바 ‘플랫폼 노동’ 종사자 등 노동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까지 얼마나 아우르고 있는지 반문했다. 이들은 민주노총을 겨냥해 “10%의 중심부 노동이 전체를 품기 위해 그동안 어떠한 노력을, 얼마나 진정성 있게 추진해왔는지 자문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저성장 구조의 고착화, 디지털 경제의 발달에 따른 산업구조의 변화, 기후 변화까지 중장기적으로 정부와 노사가 함께 풀어가지 않으면 지속 가능한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걸맞게 노동운동의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최 전 위원장은 서울경제와의 통화에서 “민주노총이 가정, 개별 노동자가 그 구성원이라고 하면 민주노총의 행동이 가정 전체를 보듬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며 “제1노총이 됐으니 책임 있게 사회의 요구에 응하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미 나이 70이 다돼 은퇴한 지 오래된 사람들인데 앞으로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며 “민주노총의 바탕을 만들었던 이들로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기를 바라는 취지”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의 한 관계자는 “노동운동 원로들께서 말씀하신 취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들 원로의 조언에도 민주노총은 4·15총선을 앞두고 강경투쟁 일변도의 ‘마이웨이’를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대의원대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참여 안건을 두고 12시간 이상 격론을 벌이고도 가결도 부결도 못하며 마무리 짓지 못한 게 단적인 사례다. 오는 17일 열리는 정기 대의원대회에도 경사노위 참여 관련 안건은 올라가 있지 않다. 온건파로 분류되는 김명환 현 위원장이 2017년 선거에서 사회적 대화 추진을 내세우며 당선됐는데도 내부 강경파에 밀린 셈이다.
민주노총은 노사정 합의 틀인 경사노위 참여는 거부하면서 노사·노정 간 직접 교섭의 틀을 만들어 사회적 대화에 나서겠다는 입장이다. 정부나 재계와 따로따로 합의 틀을 만들어 요구사항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민주노총은 일자리위원회·최저임금위원회 등 각종 정부 직속 위원회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반면 정부가 경사노위라는 사회적 대화 플랫폼을 만드는 데 든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면 별도의 협상 채널 구축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사항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직무급제 등 공공기관 임금체계, 버스 등 운수 산업의 노동시간, ‘과로사방지법’ 등 다양한 의제가 이미 경사노위에서 논의되고 있다.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노동계도 사회적 대화 플랫폼을 통할 때 노동 분야 이외의 각종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노동계 안팎에서 사회적 대화 참여 요구가 커지고 있지만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가 ‘노동존중사회’와 거꾸로 가고 있다며 대정부 공세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 전날에도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공동으로 주최한 대토론회에서 4월 총선을 앞두고 특수고용노동자의 노조 권리 보장을 위한 노조법 2조 개정과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적용을 핵심 요구사항으로 정하는 한편 비정규직·재벌개혁·정치개혁 등 분야별 8대 입법 과제도 제시했다.
/세종=박준호기자 violator@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