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중앙은행은 태생적으로 보수적이지만 그동안 디지털화폐 발행에 유독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입장을 상당히 바꾼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열린 심포지엄의 기조연설에서 레이얼 브레이너드 연준 이사는 미국에서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발행이 가능한지 연구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실험적 연구 수준”이라는 보수적인 표현을 사용했지만 “발행 계획이 없다”고 말한 지난해 연준 의장의 발언에 비하면 태도가 상당히 전향적으로 바뀌었다.
인류가 물물교환 시대로부터 금속화폐라는 공통의 교환매개를 받아들이고 이후 지폐와 기타 신용화폐를 도입해 온 과정에 대한 분석은 지금도 경제학에서 화폐금융 이론가들의 연구영역이다. 이러한 과정의 핵심은 결국 지폐 등 ‘그 자체로는 쓸모가 없는 물건’에 대한 신뢰의 확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실물이 아날로그라면 가상화폐라고도 불리는 디지털화폐는 실물이 없고 디지털로만 존재하는 신개념 금융도구이다.
인류가 이룬 많은 혁신이 극단적인 창조적 파괴에서 시작됐듯이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암호화폐의 등장은 금융 현실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기존의 경제체제는 국가가 중앙은행을 통해 통화를 중앙집권적으로 발행하고 모든 금융행위를 장부에 기록하는 것에 의존한 데 반해 비트코인의 목표는 기존 화폐와 종이장부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분산형 디지털화폐 체제의 구축이다.
이러한 암호화폐의 단점은 가치의 급격한 변동인데 이를 극복하고자 법정통화에 연동하는 중앙집중형 디지털화폐가 제안됐다. 안정적 디지털화폐를 위한 민간의 노력은 페이스북의 리브라(Libra)로 대표될 수 있으며 정부의 일원인 중앙은행의 CBDC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브레이너드 이사의 연설문에도 나와 있듯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1이 사용하는” 페이스북의 움직임은 통화체계를 관장하는 중앙은행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중국인민은행의 선제적인 움직임과 여러 선진국 중앙은행의 공동연구모임 결성에 연준도 더 이상 신중함만을 고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연준이 신중함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연설문을 보면 연준이 다른 나라 중앙은행에 비해 지불결제에 관한 권한이 전면적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제도적 어려움이 잘 나와 있다. 또 특정 국가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현금사용의 감소나 금융기관과 결제제도의 취약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디지털화폐 도입으로 얻는 이득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언급도 있다.
중국인민은행이 올해 중 CBDC 발행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오는 4월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영국·스웨덴·스위스·캐나다 등 6개 중앙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과 공동으로 CBDC의 활용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한 모임을 연다고 한다. 한국은행도 디지털화폐의 기술적 부분까지 연구하는 조직을 금융결제국에 신설하는 등 전향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뤄지는 제도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이슈에 대한 관심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브레이너드 이사도 언급했듯이 디지털화폐의 사용이 보편화하면 소규모 개방경제는 실질적으로 ‘전자적 달러화(dollarization)’가 구현되면서 통화정책에 상당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한국 경제는 세계에서 중국과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경제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