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만개 이상의 기업들이 창업 시장에 뛰어들면서 ‘제2의 창업 붐’이 거세게 불고 있다. 우아한형제들·쿠팡·무신사 등 유니콘 기업의 성공 스토리가 속속 알려지면서 스타트업 창업에 나서는 젊은이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5년을 넘기는 스타트업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스타트업의 5년차 폐업률은 72.5%에 달한다. 10곳 중 7곳 이상이 5년도 버티지 못한다는 얘기다. 창업 5~7년차에 이른바 ‘죽음의 계곡’과 맞닥뜨리게 되는 셈이다. 이는 결국 창업 시장이라는 ‘링’ 위에서 버틸 수 있는 실력·자금·영업망 등 성장자원이 부족한 탓이다. 이런 가운데 후배 창업자들이 겪는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위해 조력자를 자처하는 선배 기업인들이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영 Y얼라이언스인베스트먼트 대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 대표는 민간 중심의 오픈 투자 생태계를 구축해 후배 창업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이미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다. 투자 업체 중 2곳이 연내 기업공개(IPO)에 나설 것으로 전망되고 최근 투자한 회사는 3년 내 인수합병(M&A)이 무난할 것으로 기대된다.
보안전문 회사 테르텐 창업자이자 한국여성벤처협회장을 지낸 이 대표는 20일 서울 강남구 신사ICT타워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사람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으려면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경제가 양적·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균형 잡힌 발전이 이뤄져야 한다”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기술벤처도 중요하지만 서비스나 헬스케어, 전통 제조 등 다양한 영역의 스타트업이 저마다 독보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는 선배 기업인들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내 기술벤처 수준에 대해서는 “특정 아이디어나 특정 기술은 좋지만 딥 테크(기술의 고도화)까지 가지 못해 시장에서 사라지는 기업들이 비일비재하다”며 “정부와 시장이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기술벤처를 키워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연구개발(R&D)에 몰입하고 중장기 비전 수립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벤처협회장을 지낸 후 벤처 투자에 뛰어들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
△처음 창업에 나섰을 때도 국내 창업환경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는데 십수년 지나 회장을 맡을 당시에도 여전히 나아진 게 별로 없다는 점이 속상했다. 협회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창업하라고 독려해야 하지만 벤처 생태계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조건 창업하라고 권하기도 힘들었다. 어느 날 선배 기업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미국과 이스라엘, 심지어 중국조차 선배 기업인이 주축인 투자 그룹이 많은데 우리는 왜 없을까”라고 하소연을 하니 한 분이 “그럼 직접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씀하셨다. 평소 친분을 쌓은 선배들이 힘을 보태주면서 그림이 구체화됐다. 지난해 10월 벤처캐피털 허가를 받은 후 20억원 규모의 1호 펀드를 결성했고, 상반기 중 50억원 규모의 2호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인들이 엔젤투자자로 대거 참여했는데.
△이윤우 전 삼성전자 부회장, 임형규 전 SK텔레콤 부회장, 이경배 전 CJ올리브네트웍스 대표, 오석주 전 안철수연구소 대표, 김정태 코아팜바이오 대표, 박성택 전 중소기업중앙회장(산하 대표) 등 20여분이 참여했다. 엔젤투자자 그룹의 참여자격은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다. ‘자수성가’라는 단어에는 자신의 인생에서 피땀을 흘리며 숱하게 도전했고 각자의 분야에서 남다른 구력을 확보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렇듯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정상을 찍은 사람들 특유의 ‘겸손함’이라는 덕목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가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만큼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열망도 강하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대부분이 기술계통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술부국 대한민국’의 간절한 꿈을 안고 있기에 젊은 기술인의 창업을 지원하는 데 그 누구보다 열심이다. 오히려 돈을 드려서라도 모셔야 하는 분들인데 어떻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느냐며 의아해할 정도다.
-스타트업계에서는 벤처 1세대 출신들이 투자 파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Y얼라이언스의 차별성이라면.
△대부분은 자신이 창업한 회사를 엑시트한 후 벤처 투자와 컨설팅에 나서고 있다. 우리의 경우 파트너 대부분이 현직 기업인이고 대기업에서 은퇴한 분들도 해당 분야에서 수준 높은 경험을 하신 분들이다. 전현직 기업인들로 구성된 멘토단이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면서 가장 효과적인 솔루션을 제공하고 투자사와 함께 허들을 넘는 동반자의 개념이다. 스타트업의 경우 기술지원이든 영업이든 특정 분야를 뚫고 싶어도 루트 자체를 몰라서 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촘촘한 네트워크를 가진 우리 멘토단은 이런 문제를 (전화 몇 통화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자문을 해줄 수 있다는 얘기다. 멘토단의 인간적인 관계도 중요한데, 그런 면에서도 매우 훌륭하다고 자부한다. 매년 다섯 번의 피칭과 상하반기 세미나 모임을 갖고 있는데 70% 이상의 출석률을 자랑한다. 60세 안팎인 생면부지의 중장년 남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대한민국의 먹거리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고민하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능력을 통해 국가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것 같다. 미래를 위한, 미래 세대를 위한 재능 나눔을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Y얼라이언스는 ‘Young & Alliance Investment’의 줄임말인데 젊은 창업가들을 지지하는 선배 기업인들의 연합체라는 뜻을 담았다. ‘선한 사람들의 건강한 자금, 따뜻한 투자’를 모토로 하고 있다.
-국내 기술벤처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3년 전 Y얼라이언스가 경영 컨설팅 회사로 시작하면서 기술벤처의 부족한 부분, 예컨대 기획서 작성이나 영업망 개척 등 세일즈 인큐베이팅을 도와주면 실질적인 성과가 나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제안서 작성부터 전시회 브로슈어 제작과 매체 홍보까지 (개인 돈으로) 총력 지원했고 우리 회사(테르텐)의 영업망을 활용해 제품 판매도 도왔다. 하지만 결국 연구실 수준에서 검증된 기술과 시장에서 인정하는 기술 간의 격차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개인적으로는 기술벤처를 창업하고 키우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기에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결국 대부분의 국내 기술벤처가 겪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특정 아이디어나 기술은 좋지만 딥 테크까지 가지 못해 시장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기업들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술 수준이 낮은 이유는 뭔가.
△기본에 투입하는 절대적인 시간 자체가 부족한 것 같다. 단적인 예로 수학이나 물리 등 4차 산업혁명을 위해 핵심적인 과목들이 시험에 대비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출발점부터 코어(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공부를 하면서 필요한 사고를 키워야 하는데 전혀 안 되는 것이다. 학교뿐만 아니라 스타트업도 마찬가지다.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R&D를 하기 위해 R&D가 아닌 서류 채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기술을 깊이 연구하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정부 지원 과제를 받으려고 해도 (서류 작성) 수준이 안 되고 금융권의 도움을 받고 싶어도 여전히 담보를 요구하고 있으니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개발 같은 손쉬운 창업에 몰려드는 것이다. 로보트태권V가 무쇠 팔만 있으면 되겠는가. 튼튼한 몸통과 다리, 머리가 다 있어야 하지 않은가. 앱 기반 서비스가 나오면 헬스케어 서비스도 나오고, 하이테크 기반의 기술 창업도 나와야 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골고루 성장해야 한다. 대한민국 스타트업 시장이 지금처럼 한쪽으로 치우치면 심각한 영양실조에 걸릴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도, 투자자도, 시장도 (기술벤처에 대해) 긴 안목을 갖고 기다려주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한국 벤처가 벌써 2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은 것 같다.
△요즘 벤처 업계에서 자주 회자되는 단어가 유니콘 기업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유니콘 기업을 입에 올리는 사람들은 벤처 업계가 아닌 전혀 상관없는 분야에 계신 분들이다. 나 역시 후배 기업들이 남다른 아이디어와 기술로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하지만 우리의 ‘1등주의’가 유니콘 기업을 제외한 대다수 벤처기업들의 존재는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려된다. 지난 20년 동안 벤처 생태계가 양적 성장을 해왔다면 앞으로는 유니콘 기업 배출 못지않게 구멍을 메우고 실수를 고쳐나가면서 탄탄한 벤처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교육의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의 모데카이 셰브스(Mordechai Sheves) 부총장과 양국 엄마들의 교육열을 주제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와이즈만연구소는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인 하임 와이즈만이 1934년 설립했으며, 독일 막스플랑크, 프랑스 파스퇴르 등과 함께 세계 5대 기초과학 연구소로 꼽힌다. 두 나라 모두 남다른 교육열을 자랑하는데 큰 차이가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한국 엄마들은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묻는 반면, 이스라엘 엄마들은 ‘무엇을 질문했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더니, 한국 엄마의 질문은 얼마나 내 것으로 만드느냐에 방점을 찍는 반면 이스라엘 엄마는 질문을 통해 친구들과 지식을 나누고, 더 나아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는 의미가 담겼다는 것이다. 시선의 방향이 다르면 결과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법이다.
-여성벤처협회장을 맡으면서 정부에 쓴소리도 많이 했다. 특히 벤처 업계에서는 규제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 않은가.
△정치인이나 공무원 모두 현장을 잘 모르는 것 같다. 현장을 모른다는 얘기는 결국 현장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솔루션을 찾으려면 현장 속으로 들어가 흠뻑 젖어야 하는데 다들 바빠서 그럴 시간조차 없어 보인다. 협회장을 할 때는 규제혁파 등에 대해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샤우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마저 든다. 오히려 사업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 레퍼런스를 만들어내는 노력이 더욱 요구되는 것 같다. 무언가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어려움에 대해 샤우팅하기 보다는 성공 레퍼런스를 만들고 그 레퍼런스를 무기로 차분히 주장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에서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공의 결과물을 만들고 조금씩 고쳐가는 전략이 효과적이라는 얘기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길을 내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크든 작든 길을 내면 후배들이 우리가 낸 길을 따라 걸으면서 덜 다치고 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테르텐의 성과와 향후 계획을 소개한다면?
△2000년 테르텐을 창업할 때는 인터넷이 보급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2003년에는 디지털 하이웨이가 열릴 줄 알았는데, 우리가 너무 빨랐던 것 같다. 당시에는 대기업을 찾아가 우리 회사의 보안 기술을 접목함으로써 얻게 될 이점을 설명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보안이라는 개념이 확립된 덕분에 아직 실용화되지 않은 기술이라고 해도 커뮤니케이션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2000년대 초반 인터넷 확산은 오프라인 상에서 했던 것들을 디지털로 이동시켰다는 것일 뿐 본격적으로 인터넷 세상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사이버 월드가 열리고 있다. 핀테크를 하고, 원격 진료도 하고, 사이버 상에서 쉽게 쇼핑도 이뤄진다. 이처럼 모든 것이 연결되면서 보안의 양상도 상품에서 플랫폼으로 가면서 실전형 공격 방어가 가능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세계 최고의 보안 기술을 확보한 이스라엘 업체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차세대 기술 개발에 나선 만큼 3~5년 안에 넥스트 스테이지 기술을 만드는 보안회사로 도약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정민정 논설위원 jminj@sedaily.com
She is…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3년 광운대 수학과를 졸업했다. 1995년 KAIST에서 암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98년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보안전문 기업 테르텐을 설립했으며 2015년 2월 제9대 한국여성벤처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2017년 2월 스타트업의 액셀러레이팅과 엔젤 투자를 목적으로 한 경영 컨설팅 전문기업인 Y얼라이언스를 세웠고 2019년 7월 벤처 투자를 목적으로 Y얼라이언스인베스트먼트를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