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불만을 품고 지난해 7월4일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3대 품목의 수출규제에 전격 돌입했다. 8월2일에는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며 도발 수위를 높였다. 위기감이 고조된 국내에서는 소재·부품·장비 수입선 다변화와 국산화 연구개발(R&D) 강화, 대·중소기업 상생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다면 8개월이 지난 지금 현장의 분위기는 어떨까. 일본·미국·독일 등이 장악한 첨단소재를 국산화하고 원천소재 신기술을 개발하는 정세영(47) 엔트리움㈜ 대표와 만나 소부장 산업의 현주소와 과제를 들어봤다.
-일본 수출규제 이후 현장 분위기는.
△정부의 소부장 기업 지원이 다양하게 강화됐고 국내 정보기술(IT) 하드웨어와 부품 기업들의 국산화 수요가 늘었다. 하지만 원천소재 기술을 가진 곳은 여전히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소부장 산업을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컸는데 실제로는 어떤가.
△국책과제나 병역특례 활용, 이공계 인력 채용 시 인건비 지원 등 정부의 도움을 지속적으로 받아 감사하다. 소부장 산업 지원책이 마련돼 조만간 필요한 만큼의 수혜도 예상된다. 지난해 9월 소부장 기술특례 상장 요건도 대폭 완화됐다. 하지만 해외 공룡기업과 맞먹는 수준의 인력·기술력·대응력을 갖추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도 한 반도체 대기업의 전자파 차단 소재 양산을 위해 독일 대기업과 경쟁 중인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떠올리곤 한다.
-소재 국산화도 많이 하고 원천 신기술 개발로 주목받지 않나.
△그렇다. 반도체 전자파 차단 잉크 신소재와 방열 소재가 미래 먹거리라 글로벌 반도체·스마트폰 업체들이 주목한다. 5세대(5G) 이동통신과 자율주행 자동차 상용화 추세로 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 입자·필름 등의 국산화는 물론 반도체용 전자파 차단 소재나 신개념 방열 소재 등 원천 신소재에 매진하고 있다.
-애로가 많았을 텐데.
△TV·노트북·스마트폰·디스플레이 패널에 쓰이는 ACF 필름용 핵심 전도성 입자는 세계 시장을 독과점하던 일본의 기술장벽과 특허를 우회해 국산화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일부 제품은 일본보다 품질이 크게 나았지만 뒤늦게 특허장벽 때문에 납품을 못하기도 했다. 전자파 차단 잉크 소재는 수㎛·(100만분의 1m) 이하로 아주 얇고 균일하게 반도체 표면에 스프레이 코팅하는데 장벽이 아주 높은 기술이다. 반도체용 전자파 차단 소재는 고주파는 물론 잡기가 매우 까다로운 저주파까지 차단하고 아주 복잡한 반도체 구조에도 적용해야 해 애를 많이 먹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이공계 기피현상이 20여년 지속돼 입자·금속·폴리머·복합소재 등에서 인재풀이 부족하고 열악하다. 어렵게 영입한 전문인재들이 일당백 식으로 신입 연구인력을 지도하며 신소재를 개발한다.
-우수 R&D 인재 확보가 관건인데.
△우수 이공계 인력이 중소·벤처기업에서 함께 성장하겠다는 경우가 드물다. 가뭄의 단비처럼 병역특례 요원을 활용하나 의무근무 기간이 끝나면 이직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이공계 인력 신규채용 시 일정 기간 급여의 절반을 지원하기 시작했는데 소부장 쪽은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
-올해 정부 R&D 예산이 전년보다 18%나 늘어난 24조원을 넘는데.
△소부장의 R&D 예산 증가는 바람직하고 고맙다. 다만 대학이나 정부출연 연구기관뿐 아니라 기업에도 효과적으로 집행되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부처와 산하기관들의 과제 기획·집행이 갈수록 세분화·전문화·다양화돼 적합한 것을 찾는 것부터 쉽지 않고 경쟁이 치열해 지원받기 어렵다. 문제는 소위 ‘좀비기업’들이 컨설팅사와 같이 그럴듯하게 사업계획서를 꾸며 정부 지원금을 교묘하게 채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정부 지원금의 선순환 생태계를 만들려면.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나 정부 지원금을 사업화로 연결하는 구조를 정착시켜야 한다. 과제 선정 이후 투자기관의 검증을 거치는 ‘투자자연계형 정부 지원 과제’를 활성화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R&D 기술의 사업화 역량과 시장성을 면밀히 점검·평가해 양호하면 국책과제는 물론 투자까지 지원하고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취소 의견을 내는 것이다. 이는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투자자연계형 국책과제라든지 여러 과제를 수행하며 절감한 것이다.
-대·중소기업 간 상생이 화두가 됐는데 현장에서는 어떤가.
△창업 초기 반도체칩의 열을 획기적으로 빼내는 방열 소재 아이디어로 특허를 작성하고 반도체 대기업에 가니 엔지니어들은 ‘좋은 아이디어’라고 협업하자는데 구매팀은 ‘업력 몇년 이상, 매출 50억원 이상’이라고 벽을 쳤다. 눈앞이 캄캄했다. 반도체·스마트폰 업체 담당자들은 국내 중소·벤처기업에 우수 기술력이 있어도 협업을 꺼리는 경우가 많다. 법적 책임을 우려해서다. 사전에 철저히 검증해 그런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소부장에서 대·중기 협업이 원활하게 잘 이뤄지지 못하는 요인으로 남아 있다.
-회사에서는 어떻게 돌파구를 찾아왔나.
△대기업들은 신소재를 적용할 때 자체 양산라인 등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리스크가 있지 않나 주저하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전자파 차단 소재의 경우 만약 코팅이 잘못되더라도 자동 검사와 테스트 공정 등을 통해 리스크를 100% 거를 수 있다고 설득했다. 나아가 우수 장비업체들과 협업해 시작 버튼만 누르면 시간당 7,000개 이상의 반도체를 코팅하는 양산라인을 우리 회사에 직접 구축해 4월부터 본격 가동한다. 신소재가 원활하게 양산되고 월등한 품질·성능은 물론 장비투자비도 대당 20억원 이상 절감된다는 점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 소재·장비·공정 레시피를 한꺼번에 제공하는 원스톱 솔루션 비즈니스는 아마 세계 최초일 것이다. 다른 중소 소재업체도 테스트베드로 쓸 수 있도록 개방할 것이다.
-정부는 어떻게 나서면 좋겠나.
△정부가 기업 지원금 중 1% 정도만 보증보험으로 적립해 중소기업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피해를 보상한다면 대기업 담당자도 심리적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더라. 이게 정착되면 대기업에서 소재·부품·장비의 일정 비율을 중소기업 제품으로 쓰도록 의무화하는 길도 열릴 수 있다. /동탄=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He is…
서울대에서 재료공학 학·석·박사를 취득한 뒤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로 10여년 근무했다. 당시 국내외의 100여 소재사의 샘플을 받아 공정에 적용, 피드백하고 재평가했는데 국내 기술은 뒤처져 있고 해외 소재기업은 협업에 애로가 많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대응하면 승산이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겨 창업 출사표를 던졌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창업사관학교 등을 거쳐 2013년 차세대융합기술원 연구원 출신 1호 창업기업이 됐다. 벤처캐피털에서 투자를 유치하고 중소벤처기업부의 민간투자주도형 기술창업지원(TIPS·팁스) 사업 1호로 선정됐다. 소재 국산화와 원천 신기술 개발에 적극 나서 글로벌 소재기업으로 크겠다는 게 꿈이다.
<엔트리움은> 반도체 전자파 99% 차단...세계 최고 ‘방열소재’ 원천기술 보유
반도체에서 전자파를 차단하는 소재 기술과 열을 방출하는 방열소재 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원천기술과 상용화 능력을 가졌다. 전자파 간섭은 기기 오작동이나 전력소모는 물론 뇌종양 등 건강 악화를 초래하는데 5G통신·자율주행차 상용화 추세에서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스마트폰 내 70여개의 반도체에서 나오는 고주파·저주파 전자파를 99.999% 차단한다. 기존 기술로는 저주파 차단이 원활하지 않은데 이 회사는 고주파차단용 전도성 잉크 소재와 저주파차단용 자성 소재를 동시에 반도체에 코팅해 어떤 주파수 대역의 전자파 간섭도 차단한다. 이미 잉크 소재는 국내 반도체 대기업을 통해 양산 인증을 받았고 자성 소재도 글로벌 스마트폰사·반도체사와 양산 협의를 벌이고 있다. 현재 주로 쓰이는 실드 캔(shield can) 기술에 비해 성능이 탁월하고 부피와 무게도 월등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 일부 코팅 기술을 가진 업체에 비해서도 품질·가격경쟁력이 훨씬 뛰어나다. 최근 폴더블폰이 늘어나고 스마트폰이 얇고 가벼워져 수요 증가가 예상된다.
정세영 대표는 “반도체의 저주파 전자파 차단 신소재 기술은 글로벌 스마트폰·반도체 업체들도 수년간 R&D에 적극 나섰으나 원하는 성능·품질을 확보하지 못했다”며 “우리가 뛰어난 성능에 간편한 공법과 가격 경쟁력까지 갖추자 깜짝 놀랐다”고 설명했다.
시스템 인 패키지, 팬아웃 웨이퍼레벨 패키지 등 복잡한 반도체 패키지 구조에도 적용 가능한 전자파 차단 솔루션까지 제공한다. 좁은 틈을 채워 전자파를 차단하는 트렌치 필 전자파 차단 소재, 특정 영역만 코팅해 전자파를 차단하는 기술, 전자파 차단과 방열을 동시에 구현하는 기술과 특허도 확보했다.
매출은 지난해 86억원이었는데 올해는 전자파 차단 코팅 소재를 상용화하며 140억원으로 늘고 내년부터는 매년 2배 이상의 급증세가 기대된다. 내년 하반기에는 기술특례 상장도 목표하고 있다. 정 대표는 “현재 스마트폰용 반도체에 전자파 차단 소재 코팅 비율이 5% 미만이고 자동차·항공기 등 전장용 반도체 분야는 거의 제로”라며 “5G·자율주행차 등 수요처가 많은데 차세대 유니콘급 기술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동탄=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